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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Mar 04. 2024

'너무 버티지 마'

  부정적인 대화를 하고 집에 돌아온 날이면 유난히 마음이 힘들다. '그러는 너는 마냥 긍정적인 사람이냐'라고 한다면, 당연히 아니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비집고 나오려고 기를 쓰는 것들이 내 안에 꽉 차 있다. 부정적인 이야기가 돌고 도는 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마음의 빗장이 열려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최대한 방어태세를 갖춘다. 이따금,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공격적인 자세도 취한다. 그래서 때로는 상대의 힘듦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칠 때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 공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다만, 집으로 가면 마음이 힘들 뿐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조금씩 나를 갉아먹는다. 갉아먹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야금야금 나를 잠식시킨다. 곁에 두고 싶지 않은 감정. 그래도 정 힘들면 '아, 힘들다!'하고 내뱉으면 조금 나아지려나. 딱히 나아지는 건 없다. 생각이 형태를 가지는 순간 정말 힘든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으니까. 말을 내뱉음으로써 완벽히 진짜가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힘들다'라는 말을 아꼈다. 대신에 '괜찮다''또 지나갈 거다'라는 말로 숨기고 외면했다. (남편 빼고ㅎㅎ)



"우리는 모두 버티고 있었구나!"



버티다는 말은 끈기 쪽에 더 가까울까 인내 쪽에 가까울까.


  감당하다. 감내하다. 참다. 견디다.  

상황에  따라서 다른 맥락을 가지는 말. 부정적인 감정의 밑바닥을 치면 다시 올라올 거라고 믿었던 마음이 오만했다. 이도저도 아닌 멈춰진 저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줄 알았다.



  '우리 모두 버티고 있었다'는 지인의 말에 해답을 찾았던 걸까. 방향을 찾았던 걸까. 한주 내내 명치에 걸려있던 답답함이 쑤욱 내려간 느낌에 나도 모르게 맥이 탁 풀렸다. 한 동안 승모근이 돌멩이처럼 올라온 이유를 알 것 같다.



'잠시 내려놓아도 돼, 너무 버티지 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참 알면서 알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다.


 이런 대화가 절실히 필요했는가 보다. 혼자 마음속으로 백번 되뇌는 말보다, 누가 한번 이리 툭 찔러주면 그리 위로가 되고 와닿을 수가 없다. 소름이 돋을 만큼 기가 막힌 한 문장으로 소설 이야기의 마지막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그 '버티다'라는 단어가 오늘 3시간의 수다 끝에 방점을 제대로 찍고 마무리가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수다가 아니다. 자신이 이야기한 것은 자신이 믿길 원하는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가슴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명확히 보인다. 또한 누군가를 친구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이 그 친구 안에 존경할 만한 그 무엇, 인간으로서 어떤 동경을 품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친구를 사귀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존경하는 것은 높은 곳을 향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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