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관광객들이 스위스 국기가 있는 곳에서는 어떻게든 카메라를 꺼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걸어놓은 것일까. 잠깐 의문이 들었다. 뭐 둘 다이겠지만?
독일을 여행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독일이 전범국으로 지내왔던 세월에 대한 뉘우침과 반성의 의미로, 그리고 그들에게 피해를 입었던 여러 민족들에게 독일 국기가 어떤 의미로 전해지는지 알기에 국기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내걸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다니는 동안 이곳이 독일인지, 체코인지, 오스트리아인지 참 비슷비슷하다 하는 감상이 솔직히 조금은 들었더랬다.
그 이유일까,
스위스를 여행하는 내내, 내가 스위스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 광경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에 참 잘도 어우러지는 빨간색 스위스 국기 덕분에.
스위스는 날씨가 참 오락가락이다.
다행히 우리가 여행을 하는 대부분의 날은 구름도 잘 없는 맑은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스위스 여행인데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스위스를 여행할 때는 사실 몸이 그리 좋지 않았었다.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서 스위스로 도착하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고, 그 여행에서 여러 차례 환승을 겪고 짐을 챙겨야 하는 것이 여간 보통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무리하지 않고 도착한 다음날엔 가볍게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물론 이 결정엔 처음엔 아쉬움이 있었다.
융프라우 패스권까지 있는데,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마음이 덜컥 들었다.
마테호른을 가보는 것도 좋겠다고도 생각했고, 패스권을 이용해서 근교 여행을 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인터라켄은 교통의 요지이니 어디든 이동할 수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는 게, 그 장소에 머무른다는 선택지는 생각도 못하게 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터라켄을 제대로 둘러볼 생각은 처음에는 하지 못했었다. 어디로 이동할지만 생각했었다.
인터라켄에서 머물기로 마음먹기 직전에 잠깐 블로그를 검색했더니 여기저기서 인터라켄 구경은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말들이 많았다. 그런 거라면 우리가 인터라켄 역에 도착해서 숙소까지 올라오는 여정으로 이미 시내는 한 바퀴를 다 돌아봤던 셈이었다.
하지만 30분은 무슨 3일 내내 여기서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서 시내를 내려가고,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건 정말 30분이면 충분했다.
다만 이곳을 30분 만에 제대로 볼 수 있느냐에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참 무엇이든 다 그렇다. 어느 장소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일이든 자세히 볼수록 볼 것이 많아진다. 알면 알 수록 더 알고 싶은 게 많아진다.
그래서인가 보다.
시내는 좁았지만 오밀조밀 붙어있는 상가가 참 매력적이었다. 어느 한 곳을 빼놓고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숙소에서 받은 바우처로 무려 로렉스 여행용 스푼도 선물로 받고, 스위스에 가면 왠지 꼭 사야 할 것만 같은 프라이탁과 파타고니아는 몇 번이고 둘러봤다. 결코 저렴하진 않았지만 괜한 아쉬움에 몇 번이고 다시 들어가 봤던 것 같다. 거기에다가 빨간색으로 뒤덮인 귀여운 소품샵까지
그리고 시내버스 5분여간을 타고 다녀온 튠호수
인터라켄에는 튠호수와 브리엔츠 호수가 있다.
검색을 해볼 때만 해도 튠호수, 브리엔츠 호수가 각기 어떤 매력이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는 그렇다고 딱히 하나만 고르기에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 그런 상태였다.
그럼에도 나름의 이유로 튠호수를 첫 여정으로 선택한 것은 호수에서 탈 수 있는 카약에 도전해 보기 위함이었다.
가기 전엔 겁부터 났다.
컨디션도 좋지 않았고, 카약을 타고 물에 빠지는 상상을 하니 숙소로 돌아갈 길도 막막했다.
스위스에 처음 도착했고 날씨도 좋으니, 괜히 예쁜 원피스를 입고 싶어 지는데, 원피스와 카약은 사실 매치가 잘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 데다가 카약은 타본 적도 없는데 우스운 꼴이 펼쳐지면 어떡하지 하는 별 것 없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들.
그럼에도 해보자고 했다. 남편의 제안이기에 그래도 함께하고픈 마음이 컸고,
오늘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초짜 관광객의 마음이었다.
카약을 빌렸다.
그리고 구명조끼를 입고, 카약을 골라서 탔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흔들흔들하면서 하나둘씩 노를 저어서 앞으로 갔다.
그때부터 내가 있는 곳이 달리 보였다.
포기하지 못했던 내 원피스 위에 찰랑찰랑하게 묻어난 튠호수의 물방울들이 내 마음도 찰랑찰랑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문득 전해진 그 시원함이 내 마음도 활짝 열리게 해 주었는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 그야말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이곳에 완벽히 속해 있었다. 그 소속감이 일자 두려움도 사라지고 에버랜드 자유이용권을 끊어서 신이 난 수학여행 중인 어린이처럼 신이 나서 30분이고 1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를 저어댔다. 고장 난 앵무새처럼 계속 '와' '와' 하는 탄성과 함께
이동할 수 있는 동선이 정해져 있는 데다가, 튠호수가 워낙 넓고 깊어서 더 깊이 넘어갈 수는 없어서 그 근방만을 계속 왔다 갔다 했는데도시간이 어찌나 잘 가던지.
모르겠다. 카약을 타서 보았던 자연의 풍경은 현실적으로 좌, 우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사진 속의 풍경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도, 마음에 남은 감상은 왜 이렇게 저마다 다르고 특별한지.
블로그에서 보았던 다른 사람들이 찍어주었던 휘황찬란한 튠호수의 사진을 똑같이 사진으로 남기고 오진 못했지만, 내 마음속에 빛나는 그날의 풍경과 감상은 그에 못지않게 찬란히 빛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행을 다녀온 지 반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의 이때에도 이렇게 글을 쓰며 벅차오르는 걸 보면 말 다했지 뭐.
이 글도 누군가에게는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것에 불과하기에, 궁금해하는 이가 있다면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꼭 직접 보고 오세요.
처음 카약 설명을 들었을 땐 수줍게, 눈을 피하는 나였다면
기분 좋은 경험을 끝내고 반납을 하러 갔던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해서 아쉽다며 먼저 말을 걸고, 아쉬움을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나였다. 후자가 내 원래 본모습과 가깝다고 느끼는 나는, 그런 나를 마주한 것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기분 좋음, 즐거움, 행복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나
그리고 새로운 도전과 성공의 경험이 여행 내내 큰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체력보단 정신이 더 앞서 있었는지, 이 기분 좋은 시작이 이후 컨디션까지 잘 챙겨줄 수 있었음에는 나 또한 신기할 따름이다.
사실 스위스를 떠올리며 제일 먼저 하고픈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했고, 행복했다.'는 말이었는데 그 말에 더해서 '무언가를 했을 때는 그 이상의 충족감을 주고 짜릿함을 배로 줄 수 있는 곳이 스위스이기도 하다'는 말까지 잇고 싶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그 총평은, 이렇게 행복했던 순간들이 이어지면서 그 감상이 매 순간에도 여전히 맺혀 있어서 충분하다고 느껴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음번엔 꼭 호수에서 수영을 해보리라. 새로운 기대를 남기고 튠호수 근처에서 가볍게 피크닉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