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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C Nov 13. 2023

미술 해부학

2nd, 들어가기 2

해부학 공부


인체를 그리기 위한 과정

'인체' 2023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피하라.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는 어린 아이다. 

가르치라.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잠들어 있는 자이다. 

깨우라.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현명한 자이다. 

따르라.

- 이븐 시나[Ibn Sina, Avicenna, 980~1037] 페르시아의 철학자, 의학자, 약사, 시인, 외교관


해부학 역사 자료를 검색하다가 '나무위키'에서 이븐 시나 가 남긴 말을 보고는, 마치 귀로 듣는 듯한 짜릿한 감동을 받으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웃음이 난 이유를 말로 하기는 어렵지만, 심장이 울리는 감동을 받을 때는 항상 웃음이 나오는 버릇이 내게 있습니다. 

그가 나눈 카테고리에서 나는 어디에 속하는지 스스로 평가해 봤습니다. 

나는 '모르는 자'에 속하며, 그나마 다행히 '모른다는 것을 아는 어린아이'라는 판단이 되었습니다. 

이븐 시나는 당대 최고의 두뇌를 가진 천재로 이미 어려서부터 거의 모든 학문을 섭렵했다고 하는데, 필자의 경우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과 그것을 아는 것이야 당연합니다. 더욱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껍질만 벗겨 보고는 너무 어렵다고 한숨만 내 쉬는 우둔한 내 모습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아는 자는 현자임'이 분명한데, 그 안다는 것을 본인이 모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 '자신이 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것도 모르므로 그가 깨워진다 하더라도 현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일깨울 수 있는 자'는 그가 분명 현자일 테고, '알고 있음을 아는 자'를 '따르라'는 지침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벗이 되고 절친이 되라면 그게 맞을 텝니다. 

그러나 고대의 소크라테스는 결국 현자를 찾지 못했고, 이븐 시나의 시절에 있었을지는 의문이고, 지금의 세대에도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필자는 해부학에 관한 지식도 너무 짧아서 어디 가서 해부학을 안다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나마 간신히 필자보다 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아는 바로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다.' 정도의 말만 하고, 그 외에 다른 말은 입에 담지도 못합니다. 

해부를 직접 해 본 적도 없고, 간신히 해 본 것이라고는 몇몇 작은 동물을 분해해 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새롭게 알게 된 것 마저도 없는 경험 수준일 뿐이었습니다. 

해부학 책을 펴 놓고 근육 하나하나를 흙으로 만들어 붙여 보면서 '입체적인 해부학'에 접근하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평면적 이해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젊어서 한 때는 거의 대부분의 뼈와 근육의 이름을 외우고, 중요 근육 대부분의 '이는 곳[근육의 시작 부위]-닿는 곳[근육이 연결되어 닿은 부위]'을 메모리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들 대다수를 그때처럼 편하게 입에 담아내지 못합니다. '이게 그거였나? 저건 가?' 하면서 헷갈리는 게 많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공부할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두꺼운 인체 해부학 책에서 미술에 필요한 핵심내용을 추려내고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외래 전문용어도 많고, 난해한 설명들로 꽉 찬 글들에서 미술 관련 문장을 가려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따로 미술 해부학 내용만 정리한 책에서 조차 내가 궁금해하는 내용들을 찾아내는 것 또한 쉽지 않았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필자가 볼 때는 필요 없는 말들이 너무 많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븐 시나 같은 천재가 아닌 후배들에게 두꺼운 책을 던져주며 '해부학이 중요하니 꼭 공부해라'라고 한다면 사실 허세 밖에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공부할 때 그런 느낌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필자의 인식으로는 '조금 아는 것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은 심각한 공포입니다. 마치 '맹인이 길을 가르쳐 주는 꼴과 같다'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큼을 오픈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술 해부학 입문에 있어서 '알면 좀 더 어려운 것까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기준 내용'을 따로 정리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좀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토대가 되길 바라는 것으로, 필자가 공부할 당시 어려워했던 경험과 또 어렵사리 나름 정리했던 내용들을 간추리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아들과 딸 그리고 미술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유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은 '내가 모르는 자라는 것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것을 알면 스스로 공부하게 되고 스승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떤 제법 공부 좀 했다는 이가 '10년 이상을 한 분야에 집중 공부했다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믿고, 자기만의 세계를 열어야 한다'라며 그런 자신을 본받으라는 듯 자랑하며 떠드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어느 분야에든지 '겉으로 드러난 단순 지식'이 있다면 '감춰진 의미나 원리 또는 그 이상의 신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0년이든 일평생이든 그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어린아이이고 배울게 많은 학생일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간혹 그런 생각을 가진 이를 대면하면 '본인이 모르는 자임을 모르는 자'로 대할 뿐이고, 거의 반사적으로 피해 다닙니다. 그래서 이븐 시나의 격언을 보고 웃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해부학 역사 요약

그런 필자의 견해로는 인간지성의 정점에 이른 자들은 곧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알게 된 자'라고 판단됩니다. 그 가운데 인체 해부학에 관련된 현자들을 먼저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정리해 봅니다.


고대에도 인체 해부는 있었지만, 의학적 전문 지식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의학적 목적은 전염병 원인을 찾으려는 몇몇 시도들이 있었다고 하며, 대부분은 지역 종교 행위나 철학적 이유들에 의해서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통치정책이나 문화적 인식 또는 종교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금지된 역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해부학의 중요성에 대한 견해를 밝힌 가장 오래전 인물은, 로마 제국의 페르가몬[현, 튀르키예 서부 해안의 도시]]에서 129년에 태어나 199년 이후 어느 날 세상을 떠난 의학자겸 철학자인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라고 합니다. 그의 출생지는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기부터 의술과 의료 휴양시설이 발달했던 곳이었습니다. 

그의 의학적 성취는 코린도, 크레타, 시칠리아 그리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돌며 축적되었고, 이후 페르가몬으로 돌아와 검투사 양성소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학업 기간 동안 행한 그의 해부는 주로 원숭이나 다른 동물들에 시행되었고, 인체는 그곳에서 외상을 입은 검투사들을 치료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인체 내부의 기관들을 해부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죽어갈 많은 검투사들을 살려내면서 높아진 명성으로 로마 황제의 주치의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인체가 창조주의 섭리로 완전하게 설계되었다고 믿었으며, '히포크라테스의 4 체액설'을 받아들여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이 인체를 이루며, 프네우마가 신진대사를 조절한다고 믿었습니다. '프네우마' 곧 호흡은 고대 자연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룬 화두였고, 자연 철학의 이성적 자연 관찰에 바탕을 둔 의학에서도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학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의 해부학적 성과는 뼈와 근육을 자세히 구분했고, 심장 판막과 동맥-정맥을 상세하게 관찰했습니다. 또 뇌가 목소리를 조절하는 것을 증명하는 동물 생체 실험으로도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 성취로 400권이 넘는 서적을 출간했고 이슬람권과 기독교권 전역에 지대한 공헌이 되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전파되어 차츰 뿌리내리던 시기로, 주 후 300년간 이어진 핍박의 초기였습니다. 잔혹했던 핍박과 함께한 신학적 성장의 시기가 지나고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종교적 권력을 가지게 된 기독교회는 타락하고 분열했습니다. 또한 로마 제정과 결탁한 로마 가톨릭의 거짓 교리에 의해 성경은 금서가 되었고 지식에 대한 각종 탐구도 탄압받으면서 인체 해부 역시 철저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1천여 년 후, 유럽 전역을 혁신한 르네상스의 도래로 다시금 조심스럽게 시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과 각종 학문은 사라지지 않았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제국의 동방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주 후 7세기 이후로는 이슬람제국의 등장과 영토 확장으로 로마 동방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고, 이슬람에 의해 고대 지식의 보고는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 아닌, 같은 기독교권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약탈'이라는 비극으로 전개되었고, 1453년, 오스만 술탄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한 '제20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장 보존되고 있던 각종 유산과 장서들은 이슬람의 침략을 피해 유럽으로 흘러들어 갔고, 메디치 가문은 이슬람 제국 내의 수많은 장서들까지 구매해 도서관을 열었고, 그 지식의 보고에 의한 '피렌체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유럽의 문명은 혁신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1천 년이 넘도록 기독교리를 거짓으로 더럽히고 유럽 전역을 유린하던 로마 가톨릭은 종교 개혁가들의 저항 앞에서 모든 거짓이 폭로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의 타락상은 '창조주의 공의보다 인본주의적 정의'가 문명을 주도하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의 부흥은 철학과 신학 그리고 문예와 자연 과학의 혁신과 계몽을 일으켰고, 예술에도 지대한 성장을 일구었습니다. 건축에서는, 수백 년간 방치되어 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이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완공되었고, 또 '선 원근법'을 창시해서 평면 회화에 공간을 그릴 수 있게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술가는 보티첼리,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200년간 이어진 그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건축, 의학, 과학, 문학 등의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보이기도 하며 겸직을 했는데, 공통적으로 크게 관심을 보였던 분야가 '인체 해부학'이었습니다. 

'다 빈치'는 30구가 넘는 사체를 해부하며 수많은 자료를 남겼는데, 그 자료에 인체의 뼈와 근육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정리되면서 결국 '미술 해부학'의 시초가 됩니다. 의학적으로도 대단한 진보를 이루어 좌심방-좌심실, 우심방-우심실 그리고 판막으로 된 심장의 구조가 관찰되었고, 심장의 모형도 그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궁 속의 태아를 그린 스케치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 외에도 인체의 중요한 연구 결과물들이 많았을 테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스케치와 기록물들의 많은 양이 유실되었습니다. 그리고 200년 후 뒤늦게나마 그 가치가 중요하게 인정되고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다 빈치의 유업을 이은 분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입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난 그는 루벤 대학과 파리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동물 사체 해부를 많이 할 수 있었고, 공동묘지에서 유골도 연구했다고 합니다. 파도바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베살리우스는 주로 대학에서 외과의학과 해부학 교수로 활동을 했습니다. 

1539년에는 드디어 파도바의 한 판사의 지원으로 처형된 범죄자의 사체를 해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결과, 1천5백여 년 전 '갈레노스의 해부학 연구'는 '인체의 해부를 통해서가 아닌, 다른 동물 또는 원숭이를 해부해서 얻은 결과를 사람의 인체에 적용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의 학업 과정에서 배운 것들이 '인체 해부학이 아닌 동물 해부학'이었음을 밝혔습니다.

그 결과는 그의 저서 '인체 구조에 관하여 [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i Septem, 1543]에서 인체 해부 삽화로 상세하게 그려졌고, 전체 7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에 대한 요약본으로 'De Humani Corporis Librorum Epitome'를 출간했는데, 그의 책들로 인해 본인의 스승 실비우스를 비롯한 많은 교수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기존의 질병에 대한 일반관념을 혁신하는 해부 병리학이 창시됩니다. 

그 책의 삽화들은 이후의 모든 예술가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했지만, 필자도 역시 어렸을 때 몇몇 그림을 따라 그렸습니다.

그런 그의 업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주치의가 되었고, 후임 황제 펠리페 2세의 신임도 받았습니다. 그는 아쉽게도 예루살렘 성지 순례길에서 배가 난파되어 50세의 이른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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