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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Oct 24. 2023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곧 업무에 완벽히 적응했다.

시간에 여유가 생기자 가슴 한편에 잠자고 있던 대학진학의 열망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니 독학사가 눈에 띄었다. 독학사는 대학을 가지 않고도 스스로 공부하여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평생교육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1990년에 시행된 제도였다.


모두 4개의 과정으로 1단계는 교양과정 인정과정(2월), 2단계는 전공기초과정(5월), 3단계는 전공심화과정(8월), 4단계는 학위취득 인정시험(10월)으로 1년 안에 대학 4년 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법학전공으로 접수를 하고 야심차게 준비하여 1단계는 식은 죽 먹기로 통과했다. 그러나 2단계를 앞두고 브레이크가 걸렸다. 영치감사 준비로 두 달 동안 밤낮없이 지내다 보니 2단계는 역부족이었다. 1년 안에 못 끝내게 되었다는 생각에 더 이상의 응시를 포기하고 말았다.  바쁘다는 업무는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예전 그 새벽 2시에 일어나 5시간을 뛰던 그때를 생각하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번에는 방송통신대학을 발견했다. 방송대는 독학사 시행보다 훨씬 이전인 1970년대 초경 설립되었다. 독학사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여건으로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다는 게 설립취지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방송대는 4년 거치 10년 상환이라고들 했다. 4년 만에 졸업할 수도 있지만 10년이 되어도 졸업하기 쉽지 않은 곳이 방송대였다. 웃고 들어갔다가 울고 나온다는 말을 실감했다. 1학년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2학년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이런저런 게으름으로 많은 과목에서 학점 이수를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벼락치기는 통하지 않았다.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있었거늘.      


그렇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거의 1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대학진학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발버둥 치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다. 대학이 무엇이 건데…… 대학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 열등감의 발원지였다. 대학은 내 삶의 첫걸음이었다. 지난 10년은 어쩌면 열등감과의 기나긴 싸움이었다. 열등감은 자주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지만 때로 나를 일으켜 세우고 분발시키고 촉매제였다. 다시 방송대를 중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좌절, 실패, 포기란 가면을 쓴 화살들이 수시로 나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똑바로 걷는 듯 했지만 실제로는 늘 절뚝거리고 있었다.      


그해 11월 광주지검으로 발령이 났다.  내게 광주는 2년 6개월 군복무 기간 내내 나를 성장시켜 줬고, 첫 정규직으로 일했던 광주은행 본점이 있어 마음의 고향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광주은행 본점으로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잠시 들었다. 시골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매주 한 번씩 집에 가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씻겨드리고 군대에서 익힌 이발기 실력으로 이발을 해 드리곤 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온전한 한마디는 못하고 계셨다. 슬픔보다 화가 났다.  그것은 너무나 잔혹한 형벌이었다. 물건을 훔쳤거나 사람을 죽였거나 했다면 모를 일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이 평생을 죽어라 일만 하고 동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스스로 한 발짝도 걷지 못하게 하고, 한마디도 못하게 뇌를 망가뜨리고 할 수 있다 말인가.


집에 갔다 오는 날이면 나 역시도 아버지처럼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것처럼 망연자실했다. 광주에서는 내 전공(?)과 무관한 집행과에서 기록보존 업무를 맡았다. 별관 한쪽 구석에서 처분이 완료된 사건들을 차곡차곡 시골에서 담배 엮듯이 잘 묶은 후 2층에 있는 창고에 보존하는 업무였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면 하루 종일 작업한 기록들을 한꺼번에 서너 묶음씩 등에 짊어지고 창고로 갔는데 내 적성(?) 딱 맞았다. 그러면서 자주 내가 '검찰수사관이 맞나'는 의문에 휩싸였다.      

1997년이 오기까지 아직 여름과 가을 겨울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선대학교 야간대학에 진학하기로 목표를 세웠다. 지검에서 지척에 있었고 주경야독이라면 자신이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두드리면 열리리라! 마지막 문. 퇴근과 함께 근처 독서실로 갔다. 7개월의 주경야독었다.  국어, 영어, 국사는 그런대로 눈에 들어왔지만 나머지 과목은 워낙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지 외국어 같았다. 10살 어린 수험생들과 한 교실에서 시험을 보는데 나이 탓인지 공부를 적게 한 탓인지 나 혼자만 여유가 넘쳤다. 무난하게 준비했던 시험이라 성적은 무난하게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운 좋게  조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우울한 기분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정확히 11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10년 동안의 주경야독 열차가 조선대역에서 잠시 멈췄다. 나는 역에서 내렸다. 교정 한가운데 희뿌연 땅속에서 봄기운이 세차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나는 계속 흔들리며 달렸다. 어느 순간 열등감이란 고약한 짐이 새치기를 하며 열차 한편에 탑승했다. 그것은 틈만 나면 열차를 탈선시키려 안달이었다. 참으로 못된(?) 놈이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나뿐 놈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번 두 번 자꾸 견디다 보니 견딜 수 있는 내성을 만들어 주었고, 어떤 때는 열차를 전진시키는 새로운 동력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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