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아름다운 케렌시아(Querencia)

제주도 탐나라공화국 헌책도서관

by 김희재


이름도 생소한 그곳은, 버리면 쓰레기가 될 물건들을 재활용하여 건설한 공화국이었다.


발이 넓은 제주도 친구 덕분에 공화국을 세운 분과 직접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 관람객도 별로 없어서 우리끼리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제주도 땅에다 버젓이 딴 나라를 세운 강우현 대표는 아주 엉뚱한 분이다. 멀리서 보면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오름에다 ‘탐나라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상상의 나라였다.


누구든 들어가려면 엄연한 입국 절차를 거쳐야 했다. 입장권 대신 여권을 만들고 비자를 받았다.


<Rethinking Everything>이 건국이념이었다.


‘탐나라 공화국은 직원들의 손끝 정성과 재활용으로 땀방울을 담아 조성되어 가는 공간입니다.’라고 써 놓았다. 손끝 정성과 재활용, 땀방울이라는 어휘에 방점이 찍힌 문장이었다. 재활용을 넘어 재창조까지 해내고 싶은가 보다.


탐나라공화국 초입에 있는 조형물


강우현 대표는 생각하는 건 뭐든지 이루어가는 소시얼 디자이너(social designer)이자 상상테크 전문가다. 일찍이 남이섬에다 ‘나미나라 공화국’을 세운 창조적인 관광경영인이다. 그는 뛰어난 감각으로 여러 형태의 공간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조성했다. 아직도 꿈과 열정이 대단하여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제주도로 내려와서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하고 있다.


우리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강 대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잠시도 쉬지 않고 혼자 묻고 대답했다. 생각나는 대로 거침없이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의 이야기는 일정한 궤도 없이 제멋대로 널을 뛰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는 지금 하늘 분양사업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준비된 필지가 매진되기 전에 얼른 계약하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실소(失笑)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하늘 주소를 알고 있으면 후일에 자손들이 조상을 기리기도 쉽다고.


대놓고 사기를 치는 것 같은데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지금은 한 필지에 단돈 삼백만 원이지만 앞으로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구체적으로 하늘을 나누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공중에다 레이저빔을 쏘아 올려서 구역을 나누고 번호를 매기면 된다고 말이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이 울고 가겠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하는 그의 입심이 보통이 아니다.


하늘 분양사업을 다 마치고 나면, 땅속 공간도 잘라서 팔 예정이라고 했다. 천국과 지옥 개념은 절대로 아닌데 자연스레 죽음 너머의 세계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이참에 하늘 주소를 미리 확보해 둘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모든 것이 다 메타포였나 보다.



탐나라공화국 헌책도서관


강 대표는 머잖아 이 세상에서 책이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라 믿고 있었다. 종이로 만든 책은 전자책에 밀려서 박물관 유물로만 남게 되리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헌책들을 모아서 이곳에다 도서관을 지었다.


상상을 초월하게 아름답고 큰 ‘헌책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다. 가지런히 잘 정리된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했다. 나무로 튼실하게 짠 거대하고 정갈한 서가(書架) 앞에 서니 생명의 에너지가 확 느껴진다. 편안하면서도 압도되는 느낌, 황홀한 충격이다. 마치 애타게 찾던 나의 케렌시아에 들어선 기분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쉰다. 바싹 메말랐던 내 영혼의 우물에 다시 물이 차오르는 것 같다.


스페인어로 케렌시아(Querencia)는 피난처, 안식처라는 의미다.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둔 소가 잠시 쉬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소와 사람이 싸우는 투우장에는 소의 눈에만 보이는 안전한 구역이 있다. 투우사가 던진 예리한 칼 여러 개가 소의 목덜미와 등줄기에 꽂히면, 지칠 대로 지친 싸움소는 최후의 공격을 하기 전에 자신이 정해 놓은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고 힘을 다시 모은다. 그곳이 바로 케렌시아(Querencia)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곳이고,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이다. 잊고 있던 본연의 자기 자신과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강 대표는 나이보다 훨씬 건강하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런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산다고 했다. 언제 죽었느냐고 내가 물으니 서슴지 않고 2016년 12월 말이라고 대답했다. 어떤 연유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겁나는 것도 없다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영혼의 교감 같은 것이다. 사실 나도 오래전부터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견뎌야 할 때가 있다.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나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확 달라진다. 덤으로 거저 얻은 시간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오늘 당장 죽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 살고 싶어 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헤어나기 힘들었던 매너리즘의 늪에서 빠져나와서 거침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갈 힘을 얻는다. 여태껏 제대로 대면하지 못했던 자아(自我)와 대면할 용기도 생겨난다.



강 대표는 쉽게 만나기 힘든 기인(奇人)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광기(狂氣)를 지닌 예술가였다. 그의 거침없는 언행에 내 속에 숨어 있던 광기(狂氣)가 반응했다. 내게도 아직 발현(發顯)되지 못한 예술혼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렇게나 툭툭 던지는 그의 언어가 낯설지 않았다. 나는 수첩을 꺼내 미친 듯이 메모하기 시작했다. 작은 어록이 하나 생겼다.


인생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사는 것이다. 삶은 긍정 에너지의 발신지다. 삶은 되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건강은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이 나를 관리하는 것이다. 백세시대를 믿는 건 바보다. 그저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일 뿐이다. 날마다 믹스커피와 술만 이길 수 있으면 족한 삶이다.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저 지나간 발자국만 남기고 갈 것이다. 내가 떠나고 난 후의 일은 오롯이 남은 사람들 몫이다. 한 자리에 머무르는 건 성공이 아니다. 내가 잘 되면 배가 아픈 건 주변 사람이다. 그들의 배를 쓰다듬어 주면서 가야 한다. 그래야 내 삶도 편하다. 돈이 없으면 내 머리를 쓰면 된다. 내 머리를 써서 하는 일이 진정한 내 것이다. 경복궁은 왕이 살려고 만들었고, 불국사는 스님이 살려고 만들었다. 탐나라 공화국은 내가 살려고 만들었다. 나는 그저 오늘을 살뿐이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삶이다. 버릴 수 있는 것도 자유다. 내 삶을 내 맘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진짜 자유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 <탐나라공화국>은 지금도 열심히 건설하는 중이다.. 이왕이면 모든 상상을 다 현실화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에게도 꼭 필요한 미래공화국이 되면 좋겠다.



강우현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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