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충직한 군인과 아내로 남고 싶다
다음 날,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을 뒤에 있는 바닷가로 나갔다.
어머니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가슴 밑바닥에 숨겨 놓았던 눈물 보따리를 풀어서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는 다시금 마음 깊이 다짐을 하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가는 군인의 길이 지금은 그저 초라하고 궁색해 보여도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이다.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가득 찬 영광의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오직 군인의 아내라는 이름에 충실하리라. 내 남편이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고 떳떳한, 존경받는 군인이 되도록 뒷바라지하리라. 내가 거름이 되어 그가 꽃을 피울 수 있다면 내 인생 전부를 다 그에게 주리라.
아무리 닥치는 현실이 어렵고 힘이 들어도 절대로 울지 않고 포기하지 않겠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모든 사람 앞에 부끄럼이 없는 이름으로 기억이 되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리라.’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다 유모차를 세워 놓고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의 아득한 경계선을 바라보며 나는 평생에 잊히지 않는 결심을 마음에 새겼다. 그 결심은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더라도 과감히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차는 어느새 죽변항을 지나 예비대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멀리 돌아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남편도 우리의 신혼 시절을 고스란히 바쳤던 현장에 돌아오니 감회가 아주 새로운 모양이다.
“여기가 너희들이 태어난 집이란다. 저기 보이는 부대 뒤로 가면 아주 멋있는 집이 있는데 너희 둘 다 그 집에서 태어났지.”
“그럼 여기가 우리 고향이에요?”
“고향? 글쎄...”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작은아들은 고포에서 잉태되어서 거의 만삭까지 있었다. 마침 예비대 관사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낳기만 하고는 바로 중대장 임기를 마치고 떠났다.
“이 바보야, 여기는 그저 출생지야. 고향이란 태어나서 자란 곳을 말하는 거야.”
우리가 잠시 대답을 생각하는 사이, 큰아들이 동생을 윽박지르며 아는 체했다.
“그럼, 우리 고향은 울진, 인천, 서울, 캘리포니아 몬트레이, 플로리다 탤러해시, 대전 중에 어디가 진짜야? 우린 고향이 너무 많네.”
작은아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우리는 기억해 내기도 숨 가쁠 만치 먼 곳에서 먼 곳으로 너무도 많이 돌아다녔다.
중대장을 마치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미국 해군대학원으로 위탁 교육을 받으러 떠났다. 석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서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다가 박사 학위를 하러 또 미국으로 갔다.
남편은 되도록 쉽게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전공을 찾지 않았다. 굳이 어렵기로 유명한 핵물리학 이론을 택하여 목숨 걸고 전투하다시피 공부했다. 그렇게 고지식한 남편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은, 최전방에서 근무하는 것에 뒤지지 않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돌아갈 날을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한 국비 유학생이었다.
자비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언제까지 꼭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아무 때고 공부를 마치면 되었다. 하지만 국비로 위탁 교육을 받으러 온 남편은 정해진 시간 안에 공부를 마쳐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학업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다.
남편은 전쟁터에 나간 군인처럼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파묻혀 지냈다. 그 바람에 이번에도 집안일은 몽땅 내 차지였다.
부대에서 근무할 때나, 유학 가서 공부할 때나 남편은 언제나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의 곁에서 뒷바라지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 천생연분인지, 나는 남편만 곁에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나 늘 당당했다. 그도 나만 옆에 있으면 아무리 힘든 여건에서도 주어진 일을 꼭 해냈다.
남편은 미국 학생도 평균 8년이 걸려야 끝내는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4년 반 만에 거뜬히 마치고 귀국했다. 지금은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자리에서 자기의 기량을 발휘하며 근무하고 있다.
아이들의 생가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예비중대 관사로 쓰이지 않고 단지 총각 장교들의 짐만 넣어두는 곳이 되었다. 텅 비어있는 집에서 우리는 앨범 속에 있는 낡은 사진과 똑같은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옛날 사진에는 없는, 나보다 더 키가 큰 아이들을 옆에 세우고 사진을 찍으니 감회가 새롭다. 이곳이야말로 언제까지나 존재할 마음의 고향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전방 골짜기든 미국이든 이 세상 끝 어디라도 남편이 있는 곳이 나의 고향이 되었다. 내가 함께 있는 곳이 바로 그의 고향이 되었다.
푸른 제복을 입고 군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의 고향은 태어나 자라난 곳이 아니었다. 부르심을 받고 가는 거기가 어디든지 곧 목숨을 바쳐 사랑할 고향이 된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둘이서 한마음이 되어 성실하게 살아온 덕분에 가난하고 고달픈 순간에도 우리는 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분주하고 힘들었던 삶의 고비들을 무사히 넘기고 이렇게 중년의 길목에서 지나온 길을 반추해 보며, 삶에다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앞으로 15년쯤 더 지난 후에 다시 이곳을 찾아오게 된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바람이 있다면, 그때도 여전히 내 남편이 이 나라의 군인임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겪은 모든 삶의 질곡들을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할 수 있기를 바란다. 둘이서 걸어온 길을 아이들의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주어도 부끄럽지 않도록, 끝까지 충직한 군인과 아내로 남고 싶다.
어느덧 죽변 백사장 너머로 노을이 붉게 타들어 가고 있다. 아무 말 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던 남편은 내 손을 슬며시 끌어다가 꼭 쥐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끝)
<이 글은 1997년에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