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랗게 활짝 편 응축된 우주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이 물어본 그 단어는 내게도 매우 낯선 어휘였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 제목 ‘슈룹’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슈로 시작되는 낱말이기에 요즘 젊은이들이 새로 만들어 낸 신조어일 것이라고 언뜻 생각했다. 은어 아니면 줄임말, 혹은 외국어 합성어인 줄 알았다.
검색해 보니 예상과는 달리 ‘우산의 옛말. 슈룹 爲雨繖.’이라고 나온다. 슈룹이 우산을 일컫는 말인 줄은 정말 몰랐다.
생각해 보면, 우산이란 어휘만큼 함축적으로 쓰이는 이미지도 드물다. 수필의 소재로 많이 쓰였고, 노랫말에서도 다양한 의미로 나타났다. 내게 가장 먼저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동요 속에 들어있는 정다움이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골목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갑니다.
< 동요, 우산 >
이 노래에서 명시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가 어디를 가는지 콕 집어서 말하지도 않는다. 구체적인 스토리는 상상의 영역으로 넘겼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마음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나는 이 노래에서 딸만 셋인 집의 아침 풍경을 떠올린다. 고만고만한 딸 셋이 서로 좋은 우산을 들고나가려고 쟁탈전을 벌이는 광경이다. 셋 중에 제일 행동이 굼뜨고 마음 여린 첫째가 동생들에게 밀린다. 별수 없이 달랑 남은 찢어진 우산을 들고 나서며 엄마를 향해 살짝 눈을 흘긴다. 새 우산 좀 사달라고 하는 투정을 담은 딸의 눈짓을 엄마는 짐짓 모르는 척 외면한다.
아이들은 이내 재잘거리며 발걸음 가볍게 학교로 가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그들에게 가난은 약간의 불편함일 뿐이다. 내 상상 속에서 우산 셋이 나란히 걷는 풍경은 언제나 즐겁고 정답다.
우산은 은유적인 이미지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 어휘다
자식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부모, 언제나 곁에서 동행하는 배우자, 존재만으로도 설레는 연인,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 등이 대표적인 이미지다. 그렇게 다양한 이미지 덕분에 우산은 유행가 가사는 물론 공익 광고에도 종종 등장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획하는 독립적 공간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자기 혼자 소유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우산 속이다.
우산을 쓰면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나 상황을 피할 수 있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독점할 수도 있다.
동그랗게 활짝 편 작은 세상 속으로 우주가 들어와 응축된 힘으로 온몸을 감싸 준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에서 충만함을 맛보는 것은 축복이다. 그 오붓한 느낌은 혼자 우산을 쓰고 깊이 사색하며 걸어 봐야만 알 수가 있다.
나는 한때 독신주의자였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규범 안으로 들어가서 살 자신이 없었다.
나의 유년기는 한국전쟁 후의 가난한 시대 상황과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유교적 분위기였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새로 마주하게 된 세상에는 생소한 문화가 넘쳐났다. 책을 통해 알게 된 보봐르 부인과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막연히, 평생 한 사람에게 매여 사는 것은 답답하고 지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을 여자라는 틀에다 가두어 놓기도 싫었다.
나는 그저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다 가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내 이름으로 당당하게 사는 ‘사람’이길 원했다. 그래서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사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그런 나를 열렬히 사랑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 나도 그를 사랑했지만 선뜻 그가 원하는 세계로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연애는 하면서도 막상 결혼을 하자고 하니 많이 망설이고 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삶도 주체하기 힘든 판에 타인과 삶을 공유하며 산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나는 심신이 매우 건강하지 못했고, 여유롭고 넉넉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한 결핍으로 자존감을 상실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터널에 갇혀 있었다.
우연히 그 사람과 함께 영어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었다. 미국인 선교사님이 가르치는 그룹이었다. 성경공부는 갈팡질팡하던 내 삶에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막연한 불안과 회의에 붙잡혀 방황하던 나를 꽉 붙들어 주었다.
선교사님은 보이는 세상만 보고 절망하던 나에게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 있음을 알게 해 주셨다. 처음엔 그저 영어 배울 욕심으로 갔는데 점점 성경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나는 선교사님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따르게 되었다.
연애는 하면서도 결혼하기를 주저하던 내게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우자는 우산 같은 존재랍니다.
비 오는 날엔 젖지 않게 해 주고, 한여름 뜨거운 햇볕도 가려 주지요. 길 가다가 도로에 고인 흙탕물을 만날 때도 막아 주고, 힘들 때는 지팡이 삼아 의지할 수도 있어요. 간혹 불량배를 만났을 땐 호신용 무기로 쓸 수도 있고요.
그러니 혼자 애쓰지 말고 그 사람의 손을 잡으세요. 그는 좋은 우산이 되어 줄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그 말씀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적인 힘이 있었다. 우산 같은 존재와 동행하길 권유하는 그 말씀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콱 박혔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서서히 내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생각을 바꾸자 내 삶의 모양이 완전히 확 바뀌었다. 독신주의를 부르짖던 아가씨는 손주를 다섯이나 둔 할머니가 되었다. 그때는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선물이 그 길에 숨어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공공연히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고 말한다. 사는 게 힘들고 앞날이 막막해서 그런지 아예 비혼을 선언하는 사람들도 많다. 암울한 절망감 속에서 독신주의를 부르짖던 젊은 날의 내 모습과 비슷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모든 날들이 혼자 걷기엔 너무 멀고 막막한 길이었다.
이제는 내가 휘청거리는 사람들을 붙들어 줄 차례다. 하지만 그때 선교사님이 내게 하셨던 것처럼 강한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우산 같은 그대와 함께 걸은 덕분에, 험난하고 가파른 고비도 힘들지 않게 잘 헤쳐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은 꼭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