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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재 Apr 17. 2024

탁월한 선택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이사벨 여왕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보물들까지 팔아가며 콜럼버스를 후원하게 된 숨겨진 이유는 없을까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두 사람 간의 은밀한 감정적 교감 같은 것 말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J 시인이 툭 던진 화두였다. 우리는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을 발휘하여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다들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 지식보다는 스페인에 와서 알게 된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본 영화 <1492 콜럼버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주제로 문학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게 되었다.


외국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한글로 쓴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기가 더 힘든 현실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였다.


뿌듯하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문인 협회에서 주관한 <2023년 해외 한국 문학 심포지엄>은 유럽 문학기행을 겸한 행사였다. 시, 소설, 수필, 시조, 아동문학, 평론 등 여러 장르의 작가 28명이 함께 떠났다.


글을 쓴다는 공통점을 지녀서 그런지 처음 만난 사이에도 그리 서먹하지 않고 금세 친해졌다.     



<그라나다의 항복>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터즈 1882년 작품


1492년은 스페인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중요한 해였다.


마지막 남은 이슬람 점령지인 그라나다 왕국을 마침내 탈환하여 오랜 스페인 국토회복 전쟁(Reconquista)에 종지부를 찍은 해였다. 이로써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완전히 몰아내고 성전 꼭대기에 다시 가톨릭 십자가를 올리게 되었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러 호기롭게 떠난 해이기도 했다.



이사벨은 배포가 큰 카스티야의 여왕이었다. 당시 이사벨은 40세, 콜럼버스는 39세였다.


무모한 몽상가의 엉뚱한 이야기라고 다들 외면했던 콜럼버스의 계획을 그녀는 지지하였고, 항해 자금도 대주었다. 그저 연회를 두어 번 할 경비에 불과한 액수라고 말하며 거액을 선뜻 내놓았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뱃길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 가면 인도에 닿을 것이라는 콜럼버스의 허황한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과감한 투자는 스페인의 역사를 바꾸는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이사벨 여왕 덕분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고, 이 사건은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게 만드는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영화 1492 콜럼버스 포스터


  <1492 콜럼버스>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여 1992년에 제작한 영화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단, 마녀 취급하던 중세 유럽의 서슬 퍼런 분위기 속에서도 남다른 꿈을 꾸었던 콜럼버스의 행적을 그려냈다.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는 실제 기록과는 달리 콜럼버스를 영웅으로 미화한 작품이다. 이에 반발하여 역사 왜곡 논란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해외에서나 국내 모두 흥행 성적은 좋지 못했다. 서울 관객 동원 수가 3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는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무모한 몽상가나 이상주의자의 도전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만든다는 영화 속 메시지에 크게 공감했다.


바다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고 믿던 시대에 콜럼버스는 남다른 꿈을 꾸었다. 지구는 둥글고 바다는 끝이 없다고 믿었다.


그 시대의 귀족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콜럼버스를 엉뚱한 몽상가라고 부르며 질투하고 조롱했다. 아무도 그의 꿈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콜럼버스는 끝까지 자기의 꿈을 붙들고 나아갔고, 마침내 신대륙을 발견했다.


영화에서는 콜럼버스를 질투하고 미워했던 귀족들이 교묘하게 꾀를 내어 신대륙을 아메리카로 명명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자기가 발견한 대륙에다 이탈리아 선원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붙여 ‘아메리카’라고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콜럼버스의 허탈감과 좌절감도 밀도 있게 표현했다.


콜럼버스는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영웅, 다른 쪽에서는 살인마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의 유골이 담긴 관은 땅에 묻히지 않고 공중에 있다. 황금으로 번쩍거리는 세비야 대성당 본당에 자리를 잡았다. 왕의 복색을 한 4명이 어깨로 관을 메고 정중하게 서 있다.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던 그의 다짐은 그런 형태로 실현되었다.      


공중에 떠 있는 콜럼버스의 관, 세비야 성당




여행은 어디를 가는가보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정말로 더 중요하다. 이번 여행에서는 글 쓰는 사람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일행들과 금방 친해졌고 대화가 통했다.


10박 12일 동안 버스로 이동했다.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스페인, 포르투칼, 지브롤터, 모로코 등 4개국을 넘나들며 달린 거리가 총 5,100km였다.


우리는 빡빡한 일정을 함께 헤쳐나가면서 한 식구가 되었고, 끈끈한 전우애마저 생겼다. 불과 열흘 사이에 20년 지기 못지않게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글감을 많이 얻게 된 것도 내게는 큰 수확이었다.     


   (신문예. 2024년 1월호 발표)


콜럼버스 동상,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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