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신발을 바꿔신는 것'에서 시작된다
관심 없습니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하세요.
2008년 여름 쯤이었던 것 같은데요.
세일즈 롤을 새롭게 시작한 제가 콜드콜에서 만난 고객들 대부분의 반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던 것 같아요. 거절의 불편함이 없거나 익숙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라이프 멘토이신 당시의 그룹장님께 자문을 구했더니 답은 어렵게 찾을 수록 좋다며
우리 업이 아닌 외부 업의 영업 전문가 선배님들을 만나 답을 찾아보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제약, 자동차, 보험 등 다양한 산업의 선배님들을 찾아가 여쭈었습니다.
당시 선배님들께서 해주셨던 얘기들은 모두 감사했지만 뾰족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제게는
일반론에 가까운 조언들이었기에 (마음이 급했던 저는) 더 답답해 졌던 기억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늦은 술자리에서 한 선배님께서 취중에 주셨던 조언이 유난히 뇌리에 박혔죠.
승천이 너는 영업이 뭐라고 생각하니?
...
저는 나름의 정의를 취기에 막 떠들어 댔던 거 같습니다.
다소 무뚝뚝 하셨던 그 선배님은 제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영업은 '듣는 일'이야.
인생 살면서 소통 경험이야 많았지만, 세일즈 롤을 맡으니 '소통' 자체가 내 일이 되었습니다.
그 전의 기획 업무에서도 소통은 중요했기에 제 소통 능력에 자신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구요.
그런데 실전은 매번 녹녹치 않았습니다. 스스로는 '소통을 좀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던 겁니다.
영업은 시간 싸움이라고 했던가요. 성공해야 수익이 나는 냉정한 현실 속에서,
고객을 설득해서 우리 회사의 HRD 서비스와 컨설팅이 '최적의 솔루션'임을 증명해야 하는 저는
하루 하루 쫓기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은 나아지기는 커녕 더 악화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던 중 '장금상선'이라는 고객과의 첫 프로젝트에서 저는 보란듯이 실주를 맛봅니다.
실주라고 하기에도 너무 작은 금액이었지만 분명한 실패였고, 실주였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왜 실패했는지' 알아야 했죠.
용기를 내아 고객에게 이유를 여쭈었을 때 그분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삼성의 HRD 서비스가 뛰어난 건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솔루션은 없는 것 같아서요...
갑자기 술자리에서 선배님의 얘기가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제가 놓친 것은 고객의 필요 였고, 저는 그걸 놓쳤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저는 잘 듣지 못했죠.
Peter Drucker는 품질이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고객이 우리 상품을 통해 느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품질에 대한 효용이나 만족의 주체는 고객이니,
저는 고객이 가려운 곳을 묻고, 그 곳을 긁어줘야 하는게 당연했죠.
하지만 저는 고객이 어디가 가려운지도 모른 채,
제 어림짐작으로, 어쩌면 제가 가려운 곳을 긁어댔던 것 같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지금도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
사실 소통에서 '잘 듣기', 즉 경청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연구에서도 집중에서 듣는 행위는 우리의 몸에 가벼운 위기 상황에 처한 것과 유사한
신체 각성 및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증명되었죠.
그런데, 당시에 그런 생리적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그냥 말하느라 매번 너무 바빴습니다.
실제 들을 때 우리 뇌의 능력의 25%만 쓴다고 하니, 나머지 75%가 다른 길로 샜던거죠.
심지어 고객이 이야기하는 중에도 '다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할까'에만 골몰했습니다.
고객이 본론에서 잠시 벗어나기라도 하면 성급하게 끼어들기 일쑤였고,
'내가 전달하고 싶은 것'만을 욱여넣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저는 의식적으로 '듣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고 간단한 세 가지 원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는데요.
첫째, 섣불리 끊지 않기
너무 빨리 반응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끊지 않으려 했습니다.
내용에 개입하고 싶을 때에는, 우선 메모해 두고 나중에 말했죠.
둘째, '가정 없이' 이해하려 노력하기.
내 가설이나 스키마로 섣불리 단정 짓지 않으려 했어요. 들리는 그대로의 상황을 파악하고,
궁금한 부분들을 역시 메모했죠.
셋째, 더 많이 꺼내게 해서, 더 많이 듣기
상대방이 편하게 마음을 열고,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게 노력했습니다.
가령 사적 얘기나, 제 약점도 적극적으로 공유해,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게요.
흥미롭게도, 이런 '듣는 행동'의 변화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고객들과의 단단한 관계를 맺을 기회가 늘어났고, 당연히 업무 성과도 늘어났죠.
놀라운 것은, 그들이 개인적인 문제나 직장에서의 깊은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고객이 주최하는 행사에서 사회도 보고, 심지어 제가 유학 길에 오를 때는 추천서까지 써주셨죠.
고객과 나 사이의 간격이 줄어든만큼, 신뢰가 깊어졌다고 당시에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방법은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덕북에 컨설턴트 일때도, 투자자일 때에도, 상대의 이야기를 더 많이, 더 잘 들을 수 있었죠.
지금도 고객 미팅에서는 많은 시간을 '질문하고, 고객의 이야기를 기울여 정성껏 듣는 데' 씁니다.
당시 제가 깨달은 것은 "모든 영업은 고객의 문제에서 시작한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멍청하게도 우리 상품/솔루션에서 시작하는 영업을 하고 있었던 거죠.
요즘 같은 세상에 최고로 좋고 누구에게나 딱 맞는 제품은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저는 신뢰할 수 없구요.
게다가 우리는 종종 고객을 가르치려고 하는데요.
우리는 누군가를 신뢰하기 전까지는 상대방으로부터 무얼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고객이 관심사는 무언가를 알고자 함이 아니고, 더 나아지고자 함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업의 방점은
고객의 문제를 경청하고 공감해
'더 나아지도록 돕는 것'에
찍혀야 하는 것이었죠.
경청은 한자로 기울일 경에 들을 청자를 습니다. 즉, 상대를 향해 기울여 듣는다는 의미죠.
저는 그 본질에 정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시지로 전해지는 Text 뿐만 아니라
그 뒤의 Context 까지 읽어내려는 노력이 가미된 '정성 껏 듣기'인 것이죠.
고객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조리있게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단시간에 모든 맥락을 넣어 전달하기는 더욱 어렵죠. 어떤 부분은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도 많고, 어떤 부분은 이미 말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합니다.
그러니 청자 입장에서는 더욱 열심히 듣고, 빠진 것은 없는지 물어야 합니다. 메시지에 앞선 의도를 생각해 보고, 화자가 메시지를 전할 때의 표정, 미팅에 동참한 다른 이들의 반응이나 분위기도 읽어내려고 하는거죠.
메라비언의 법칙을 떠올리면서요. 고객의 문제를 정확히 인지해야 그 다음 단계인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공감은 우리가 아는만큼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상대의 입장을 정확히 알 때까지 물어보고 이해해 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충분한 정보 없이 지레짐작해 해석하고, 쉽게 판단하고 얕게 분석해 조언하는 것은 섣부른 접근입니다.
그건 고객이 우리 솔루션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맞춤형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죠.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님은 책 <<당신이 옳다>>에서 공감과 공감 코스프레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슬픈 이야기에 눈물이 또르르 흘리는 것만으로는 공감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그저 감정적 반응(reaction)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세상의 어떤 고민이나 문제도 같은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상대가 가진 문제의 고유함을 정확히 이해해야 좋은 조언을 줄 수 있는 것이죠.
정확히 이해될 때까지는 계속 묻고, 맥락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건 공감이 아닌 공감 코스프레이고, 영혼 없는 리액션일 뿐 입니다.
공감에 기반하지 않은 '섣부른' 조언이나 제안은 고객에게 닿기도 어렵고, 쉽게 수용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공감은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 보는 것(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에서 출발합니다.
처음 고객 입장에서 고민을 시작해
고민의 여정을 함께 하고 해결에 이르는 과정 전체가 공감 프로세스인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 근거한 제 미팅 루틴을 공유해 드리면 도움이 될 것 같아 공유해 봅니다.
미팅 전
고객 및 고객기업의 문제를 더 잘 공감하기 위해 정보를 취득합니다. 뉴스 기사나 지인을 찾아 고객 기업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공부하기도 하고 Linkedin이나 SNS를 활용해 고객과 저와의 공통분모를 찾아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더 잘 듣기 위함이고, 공감대를 찾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미팅 중
저는 상대방이 더 편하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상대가 대답하기 쉬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편하게 느끼도록 제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공감의 통로를 만듭니다.
상대도 상대의 얘기를 더 많이 꺼낼 수 있게 유도합니다.
쉬운 언어로 화두를 던진 후, 대부분 시간은 고객의 얘기를 심혈을 기울여 듣는 데 할애합니다.
메러비언의 법칙에서 말하는 것 처럼, 단지 메시지나 특정 어휘 뿐 아니라 고객의 표정이나 뉘앙스,
그리고 상대의 객관적 의견과 주관적 의도를 분리해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미팅 후
미팅이 끝나고 나면, 가급적 24시간 이내에(기억이 왜곡되지 않게) 회의록으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나서, 고객의 얘기 중 중요한 부분은 HR 용어나 경영학의 개념으로 치환하죠.
고객은 내가 언제 이런 얘기를 했었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회의록을 읽어내려 가면서 미팅 중에 설명하지 못한 맥락의 연결점을 다시금 정리하실 수 있게 도우려는 목적입니다.
이렇게 제가 시간을 두고 회의록을 전달해 표현하고 싶은 것은 별 다른 게 아닙니다.
1. 제가 미팅을 통해 고객의 어려움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2. 우리의 솔루션이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 충분히 고민했다는 사실을,
진정성 있게 전달하려는 두 가지 목적 뿐 입니다.
그 뒤로 저는 약 1800명이 구독하던 Weekly Soh-tong이라는 매거진을 펴냈습니다.
나름 제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먼저 던져 이야기 거리를 만들려는 의도였지요.
먼저 얘기를 걸어오는 분들도 점점 많아지니 고객과 친구의 경계도 애매해 지곤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저는 소통의 자신감을 되찾았습니다.
물론 여전히 거절당하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습니다.
나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실패를 통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좌절 덕분에 자존심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원인 알아낼 수 있기를 갈구했습니다.
그리고 흘려 들었던 선배님들의 조언을 제 현실과 연결해서 적용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는 매일 계속되는 소통의 과정에서 계속 배우며 가다듬고 있습니다.
'더 잘 듣는 법'을,
'더 깊이 이해하는 법'을, 그리고
'더 진정성 있게 연결되는 법'을 말이죠.
경청과 공감 뿐 아니라 표현의 진솔함,
그리고 아직 부족하지만 친절함과 다정함까지 더해져가며,
제 소통력은 지금도 성장 중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흔히 소통을 '말 잘하는 기술'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소통은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신발을 바꿔신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고객의 얘기를 경청하고 마음 깊이 공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연결'이 일어난다는 지극히 일반론적인 메시지를
오늘은 제 글을 읽어주시는 소중한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