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부터 글과 그림을 통해 삶을 기록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작지만 큰 소망이 생겼다. 어떤 직(職)에 있건 업(業)으로 삼으며 살다가, 시간이 더 흐르면 그것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 것이다. 근데 막상 어떤 것들을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어떤 걸 말하고 싶은 거지?’라는 질문이 계속 올라왔다. 그런 고민들이 지속되면서 ‘내 생각, 내 경험’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남의 의견에 휩쓸리는 것이 아닌 내 생각을 할 줄 알수록,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 겪은 것이 많을수록 표현하고 싶은 그림과 글이 풍성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의 경험의 폭이 얄팍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새로운 무언가를 해보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고양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문화기획자 양성과정 <청년 마주학교>’에 참여하고 있다. 그 과정은 만19세~39세인 사람들이 참여 가능한데, 연장 모집 마지막 날 우연히 발견하고는 ‘문화’와 ‘기획’이라는 단어에 꽂혀 바로 신청했었다. 사실 두 단어를 누가 물어본다면 뚜렷이 설명하기 쉽지 않다. 느낌만 있을 뿐이다. 고맙게도 누군가는 사전적 정의를 내려줬는데,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 기획,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의 변화를 가져올 목적을 확인하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설계하는 것.
내가 이 기획이라는 단어에 꽂힌 것은 ‘무엇인가를 배우고,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계획해서, 실현하는 과정을 겪는 것’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올라왔기 때문이고, 그 주제가 ‘문화’라는 사람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기획자들의 경험이 녹아있는 강의와 나를 알아가는 활동, 문화예술공간 탐방 등을 통해서 ‘문화기획’이라는 분야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어렴풋이 그것에 대해 알아가면서 배우는 내내 행복했다. 10월 말에는 각자 하고 싶은 기획을 발표했고, 같이 진행할 팀원을 모았다. 11월 한 달 동안 팀원들과 그 기획을 구체화하고 계획을 세워서 실행하는 과정을 거친다.
내가 하고 싶은 기획을 들여다보니 20살 때부터 최근까지 경험했던 것 중 좋았던 활동들을 나열한 프로그램을 그럴싸하게 짰던 게 아닌가. 기획서는 또 어떤가 하니. 업무를 할 때 쓰던 방식대로 한 장짜리 기획서를 뚝딱 만들어버렸다. 어딘가 익숙한 기획을 하고 있을 때, 마음 한쪽이 석연찮기는 했지만 편하고 즐거웠다. 내가 했던 경험에서 뽑아낸 것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팀원들은 처음 보는 프로그램이었을 테니까, 처음 보는 기획서였을 테니까 신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핑계로 너무나 익숙한 대로 만들었다는 것을.
현업 기획자분들께서 초안 계획서를 가지고 한번 검토해주시는데, 그분들한테는 바로 들켜버렸다. 틀이 정해진 재미없고 닫힌 기획이라는 것을. 그분들은 조금 더 결말이 열려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획, 참여자들이 만들어가는 기획을 기대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만남 이후에도 일상에서 변화할 수 있는 기획을 바랐고, 기획한 우리부터도 신선하고, 재미를 느낄 기획을 하길 바라셨다. 무엇을 바라시는 지는 알겠는데 방법을 모르겠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수정 해야했다. 불편했고, 막막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주말에 목포로 2박 3일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쉬어도 실패해도 다시 시작해도 괜찮은, 괜찮아마을’을 슬로건을 가진 여행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선했고, 재밌었다. 이런 게 ‘기획이구나. 콘텐츠구나.’ 하는 것을 배우고 온 여행이었다. 목포에 대해서 배우고, 직접 돌아다니고 나서는 내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여행 상품을 기획했다. 팀원과 상의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기획 의도와 콘텐츠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PPT 속 사진과 문장, 그리고 영상까지 제작하여 발표했다. 6개 팀 모두 다른 목포 여행을 기획했고, 각 팀별 개성이 두드러졌으며, 모두 흥미로웠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깨달았다. 현직 기획자 분들이 말했던 지점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번 여행 경험을 통해 ‘기획’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장될 수 있었다. 문득 미술학원 첫 수업 날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은 경험한 만큼만 상상할 수 있어요. 아무리 새로운 것을 생각해낸다 해도, 그것은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떼어내고 붙여서 재창조하는 거예요.’ 그래서 좋은 것을 자주 보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구나. 어쩌면 상상력은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의심해보고,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시도해보고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겠구나. 나이가 들수록 새로울 게 없다고 하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곳을 가고,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운다면, 더 많은 경험의 재창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신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