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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pse Sep 17. 201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080309 in 1pagestory


나의 발걸음이 닿는 곳은 늘 일정하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은 늘 같은 시간, 같은 속도, 같은 걸음 수로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집을 오간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쳐지지 않도록, 부러 날이 화창한 날에도 조금 천천히 걷는다. 오로지 내 신경은 나의 걷는 속도와 발걸음 수에 맞춰져 있어 주변의 어떤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본능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몸이 움직인다. 집에서 출발한 지 12분 27초가 지나고, 내 발걸음 수가 237걸음이 되는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오로지 걷는 일에만 집중하는 내게 어디선가 이상한 종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그 소리에 발걸음을 멈춘 순간 내게 정해진 시간이라는 틀이 어긋났고, 내 귀에는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 같은 그 음악은 보기에도 오래된 구멍가게에서 나오는 소리였고, LP판이라도 얹어 놓은 듯 본디 제 노래의 속도보다도 느릿느릿 남자 가수의 목소리가 슬로우 비디오라도 보는 것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잠시 멈춰 난 그 노래가 끝나길 기다렸고, 내 시간은 점점 어긋나고만 있었다. 노래가 멈추고 내가 놓친 시간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나의 시계는 12분 27초가 지난 그 시간에 멈춰있었다. 내가 한 발자국을 옮기자 그제야 내 시계는 다시 움직였다. 평소와 다름 없이 학교에 도착해서 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자 시곗바늘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내 시계보다 1분 36초 느린 8시 48분 24초.
  아침에 있던 신기한 일은 어떻게 설명 해야 할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그 노래 제목을 찾으려고 오전 내내 하릴없이 인터넷을 뒤적였다. 아주 늘어진 그 목소리는 귀에 맴돌지만, 가사는 들리지 않아서 유일하게 또렷이 들렸던 ‘시간’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내 머릿 속 온갖 기억들을 뒤적여 봐도 도통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침대에 누워 내일 아침을 기다렸다.
  다음날. 애써 빨라지는 내 걸음을 간신히 조절하면서, 어제의 내가 좀 이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 노래가 다시 들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반반씩 가지면서 237번째 걸음을 내디뎠고, 시계는 12분 27초로 넘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그 시간, 그 걸음 수, 그리고 그 구멍가게. 그리고 들려오는 그 목소리. 세상이 멈춘 것 같은 편안함 속에서, 그 목소리는 아주 천천히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해서 흐르고 있었다. 노래는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나는 곧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 옴에 아쉬웠다. 어제의 당황스러움과는 다르게, 나는 그냥 그 시간을, 그 노래를 온전히 느꼈다. 노래는 멈추고, 내 시계와 내 발걸음도 다시 시작됐다.
  오늘은 가사를 자세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237번째 걸음과 12분 27초의 시간에도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더는 그 장소가 아니었다. 낡은 구멍가게는 이미 다 허물어진 상태였고, 길 한편에 그 가게에서 쓰던 것 같은 낡은 오디오 한 대가 버려져 있었다. 멍하니 그곳에 서 있는 동안 내 시계는 이미 13분 33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디오에 다가가 뚜껑을 여니 낡은 LP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이미 반으로 쪼개진 그 판은 더는 노래를 할 수 없게 된 모습이었다. 아마 난 조각난 LP판 사이의 시간에 들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이미 깨어져 조각난 틈을 넘지 못해 걸려있는 그 시간. 붙이고 싶어도 붙일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가 알고 싶어 하던 그 노래의 제목이었다. 조각난 LP판이 내게 말해줬다. 아마 난 그 길을 수도 없이 걸었을 것이고, 그 음악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늘 내 시간에 갇혀 오로지 내 발과 내 시계만을 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수도 없이 반복된 그 시간을, 그 노래 역시도 지켜봤던 걸까. 시계를 보니 오늘은 지각이다. 아무렴 어떠랴. 몇 년 만에 고개를 들어 본 하늘은 눈부시게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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