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130 500번째 당선작 in 1pagestory
2000년 겨울.
1999년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들썩인 지 1년이 지나버렸다.
그 해 고3이던 나는 세상과는 무관하게 모든 신경이 한 사람에게 쏠려있었다. 오로지 1년을 그 사람을 위해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하지만, 그 해 본 수능은 내 기대와는 다르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그와 함께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그 사람도 내보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나가주리라 생각했던 그 사람은 이미 내 머릿 속뿐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뭔가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무작정 새벽녘에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한쪽의 매표소 위에 가득한 생소하고도 낯익은 지명들을 바라보다가 가장 위 편에 자리한 강릉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부모님이 예전 그곳에서 사신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기에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강릉까지는 3시간 30분이 걸렸다. 낯선 도시에 내려서자 혼자라는 생각이 더욱더 깊어졌다. 10시. 아무것도 넣지 않은 배 속이 혼자 꼬르륵 거리고 있었다. 작은 매점에서 딸기 우유를 하나 사서 빨대를 꽂았다. 입 안에 달고 단 딸기향이 맴돈다.
다시 무작정 터미널을 나서서 바다로 추정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순간 매서운 바람이 내 몸에 와서 부딪힌다. 온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다. 코트의 단추를 여미고 목도리를 더욱 단단히 감아본다. 얼마를 걸었을까. 경포대를 알리는 표지판이 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발걸음이 더욱 바빠진다. 빼곡한 소나무 샛길을 넘자 드디어 바다가 보인다. 평일이라 그런지 모래사장은 한산했다. 더욱더 강한 바람이 내 몸에 부딪혀왔지만 바다에 눈길을 빼앗긴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을 파도가 모래사장을 쓸어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다가 닿지 않는 곳에 서 있던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바다로 향해갔다. 파도가 내 발등을 덮치려는 찰나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내 발자국만을 파도가 집어삼켰다. 쪼그리고 앉아 그의 이름을 바다에 새겼다. 그리고 안녕이라고도 함께 써 본다. 가만히 앉아서 파도가 그를 먹어주길 바랐다. 내 안에서 꺼내놓은 그를 파도가 집어삼켜 주길 바랐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채 10분도 안 되어서 그는 바다에 먹혔다. 그 순간 입을 벌려 내게 불어오는 바람을 속 안에 가득 채웠다. 차디찬 그 바람이 내 안에 들어가서 시원하게 씻어주는 것 같았다. 바람을 타고 들어온 물방울이 내 입 안을 적셨다. 짜다. 바닷물처럼. 하염없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7년 전 겨울의 일이다. 파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쓸려 보내는 의식을 처음 시작한 무렵의 일이다. 지금 나는 다시 그 바다에 와 있다. 그는 저 바다 안에서 잘살고 있을까.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는.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을까. 안녕. 소리 내어 인사해본다.
그때는 할 수 없던 일을 이제는 할 수 있다. 펑펑 쏟아낸 눈물과 함께 그 사람을 흘려보내고는 힘겨움에 지쳐 돌아서는 길에 주책 맞게 주려온 뱃속을 빵과 우유로 채워야 했던 그때와는 달리 따뜻한 국물이 나오는 식당에 혼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말했다.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을 때 진정 어른이 되는 거라고. 여기저기 TV에 나온 맛 집이라고 즐비한 광고판 사이에 무색하게 서 있는 허름한 국숫집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문을 열자 으레 상상하던 그 집의 냄새가 내 코끝을 스친다.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 맡아본 듯한 냄새. 할머니가 따듯한 보리차 한 잔을 내주신다. 그리고는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묻지도 않고 잔치 국수를 말아 내오셨다. 한 젓가락씩 입 안에 들어갈 때마다 7년 전 그 때 바람이 식혀주었던 차가운 내 속이 서서히 따뜻해져 온다. 나는 그 때 이 곳에서 무얼 버리고 갔던 걸까. 이 따뜻함을 두고 갔던 건 아닐까. 입 안에 다시 짜디 짠맛이 맴돈다.
하지만, 더 이상 차갑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