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pse Oct 01. 2015

4월이야기

071206 in 1pagestory

지금 거리에 흩날리는 벚꽃 잎들은 내게 아련한 기억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아주 오랜 옛날의 기억. 어느 날엔가 꿈으로 나타났던, 정말 생생한 나의 기억입니다. 나는 이웃나라에 살던 작은 소녀였습니다. 낯설지만 눈에 익은 그런 차림으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시끌시끌한 장터를 오가고는 했었죠. 그날이 되면 거리에는 사람들이 즐비하고 신기한 구경거리들로 넘쳐났습니다. 나는 길을 잃을까 두려워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는 고개만은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돌려대고는 했었죠.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헐거운 신으로 종종걸음을 걸으면서 그 거리를 누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어린 내 손의 한 뼘쯤 나보다 키가 컸습니다. 그전에도 우리는 몇 번쯤 마주쳤던 모양입니다. 그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거든요. 사람이 많던 그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어깨에 붉은 술이 달린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걷던 그를 스치는 순간, 바람이 불더니 어디선가 붉은 실 한 올이 날라 와서는 그의 옷깃에 앉았습니다. 아주 가느다란 실 한 올이었는데도 내 눈에는 아주 커다란 실 뭉치로 느껴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었습니다. 신기하게, 그도 내게 손을 뻗었습니다. 나는 그의 옷깃에 붙은 붉은 실을 집어들었는데, 그의 손에도 꼭 같은 것이 들려있었습니다.
  
  “あかい いと。”
  누가 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실을 집는 순간 세상이 고요해지더니 내 귀를 울린 말입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그 많던 사람은 사라지고 무수한 벚꽃 잎만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 손을 잡더니 어디론가 나를 데려갔습니다. 하늘에서부터 기와가 줄줄이 매달려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도 모르게 내 시선이 안 닿는 저 먼 곳부터 붉은 술을 단 기와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가 등에 메고 있던 것이 바로 그 기와였던 모양입니다. 붉은 술이 달린 기와.
  그는 기와 하나를 가져오더니 자신의 검지를 이로 물어뜯고는 잘 알아볼 수 없는 글을 씁니다. 내게도 똑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내 작은 손가락을 내 작은 이로 물어뜯습니다. 소원을 그곳에 쓰면 반드시 이뤄질 거라고 그는 내게 말했습니다. 손끝의 아릿한 감촉을 느끼며 나는 알아보지 못하는 글을 적어나갑니다. 그게 내 꿈의 전부입니다.
  
  문득 그 꿈의 기억에 이끌려 나는 흩날리는 벚꽃 잎이 잘 보이는 찻집의 외부 테이블에 홀로 앉았습니다. 누군가 테이블에 파놓은 ‘사랑해요.’라는 붉은색 글귀를 손끝으로 느껴가면서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초점 없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봄을 미처 느끼지도 못하고 저마다 잰걸음을 옮깁니다.
  
  그때, 아련한 기억과 같은 바람이 살랑하고 불더니 날아온 벚꽃 잎 하나가 내 손 위에 앉았습니다.
  아! 떠올랐습니다. 내가 썼던 소원. 지금 내 손끝에 느껴지는 아릿한 감촉이 내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제야 보입니다. ‘사랑해요.’ 밑에 있는 두 개의 이름. 생각이 멈추자 나는 그를 향해서 걸음을 옮깁니다. 그도 내게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바람이 말해줍니다. 우리는 돌고 돈 오랜 걸음 끝에 저 길 어딘가에서 마주할 것입니다. 그때처럼.
  그와 나의 소원이 같았다는 것도, 이제야 떠오릅니다.
  
  ‘다시 만나자. 우리.’
  
  * あかい いと。(赤い糸) : 아카이 이토.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연결된 운명의 붉은 실.

매거진의 이전글 그해 겨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