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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pse Sep 14. 2015

사랑한다는 말

071107 in 1pagestory

사.랑.해
  마음속으로 말을 그려봅니다. 이 말이 주는 어감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사'라고 말할 땐 무미건조하다가 '랑'이라고 말하는 순간 생명이 불어 넣어지고 '해'라고 말해야 비로소 마무리가 되는 느낌이네요. 거울 앞에 서서 소리 없이 사.랑.해. 라고 입 모양을 만들어 봅니다. 오늘은 그녀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저 멀리 그녀가 들어오는 게 보입니다. 환한 웃음을 띄며 오네요. 문득 심장 한편이 심하게 요동치는 걸 느낍니다. 혼자 또 조용히 되내어 봅니다. 사랑해. 그녀가 내 앞에 오기 전에…….
  
  내 앞에 앉은 그녀의 눈 안에 내가 들어 있네요. 아마 내 눈 안에도 그녀가 환한 모습으로 담겨 있겠죠. 서로가 서로 안에 담겨있. 참 좋은 느낌입니다. 말없이 이렇게 서로 바라만 봐도 좋은데 그녀는 내가 재미없다면서 투덜댑니다. 어떻게 해야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요. 전 이리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참 벅찬데 말이죠.
  
  그녀는 자신의 친구 얘기를 꺼냅니다. 그 친구의 남자친구는 어떻고 저떻고. 부럽다는 얘기를 합니다. 자기도 사랑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입 안에서만 도로로 맴돕니다. 갓난아이가 엄마라는 말을 하기까지 오랜 연습이 필요했을까요. 제게도 많은 연습이 필요한가 봅니다. 이렇게 절실한데도 입안에서 맴돌기만 하는 걸 보면. 역시나 그 말은 연습이 필요한 말인가 봅니다. 수없이 되뇌어도 그녀 앞에만 서면 입안에서 나오지 않는 말인 걸 보면 아직은 연습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합니다.
  
  계속 재잘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조용해집니다. 멍하니 주스 잔을 들어 입에 빨대를 물고는 창 밖을 바라봅니다. 저는 그런 그녀를 바라봅니다. 잘근잘근 빨대를 씹는 그녀.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그녀의 머릿속 한편에 저의 자리가 있긴 할까요. 단 하나의 점으로 존재해도 그녀 안에 제가 있다면 참 행복할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아닙니다. 머릿속보다는 마음속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욕심이 지나친 걸까요.
  
  이 자국이 난 빨대를 이번에는 이리저리 휘젓고 있습니다. 뭔가 맘에 안 드나 봅니다. 볼에 바람까지 불어 넣네요. 갑자기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즐거웠으면 좋겠는데.
  
  “ 음…. 음….”
  
  괜히 헛기침을 해봅니다. 그녀가 휘젓던 빨대에서 시선을 돌려 저를 쳐다보네요.
  
  “ 흠…. 흠….”
  
  아. 괜히 헛기침만 나옵니다.
  
  “ 사래 걸린 거야? 물이라도 마셔봐. ”
  
  그녀가 자신의 앞에 있는 물잔을 건넵니다.
  
  “ 사…. 사…. ”
  
  무미건조하기만 한 '사'자 앞에서 맥을 못 추겠습니다.
  
  “ 사? ”
  
  “ 사실은….”
  
  아. '랑'자가 와야 할 공간에 어찌 저 말들이 나오나 모릅니다.
  
  “ 사실은? ”
  
  그녀의 눈이 점점 제게 집중됩니다.
  
  “ 자. 잠깐 화장실 좀….”
  
  아…. 아. 정말 땅이라도 치고 싶습니다. 결국, 도망치듯 화장실로 달려갑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이리도 한심할 수가 없습니다. 휴. 휴유. 크게 숨을 내쉬어봅니다.
  
  사.랑.해.
  다시 한번 입안에서 굴려봅니다. 이 단어를 말하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두근. 그녀 모습이 아른아른 거리는데. 참 내뱉기 어렵습니다. 수도꼭지를 틀어 잔뜩 땀이 밴 손을 넣어봅니다. 시원하게 물줄기가 손을 씻어줍니다. 물에 젖은 손을 두 눈에 가져다 대봅니다. 눈 또한 시원해집니다. 거울에 비친 내 눈에 내가 비칩니다. 그 비친 눈 안에 또 거울 속의 내가 보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내 모습 속 어딘가에는 마치 그녀가 보이는 듯합니다. 내 안에 그녀가 가득 차 있어서일까요. 내 안에 들어 있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용기 내서 말해봅니다.
  사.랑.해.
  
  이젠 나가서 말해야 할 차례입니다.
  배우지 않아도. 연습하지 않아도. 이젠 정말 참을 수 없이 차올라서 어디로든 나올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말로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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