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컨텍트(원제 Arrival)’ 2016
첫 시작은 주인공 루이스가 병원에서 자신의 딸의 죽음을 접하며, 둥근 곡선의 복도를 걷는 뒷 모습을 팔로우하며 첫 시퀀스가 끝난다. 이후 미디어를 보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가로질러 가는 루이스를 트랙킹하며 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영화는 제시 된 프레임과 제한 된 사고로 사는 사회의 두려움을 수시로 보여준다. 혼잡한 사람들, 그리고 가운데를 축으로 좌석들이 둥글게 배치된 강단에 선 루이스, 10명이 채 안되는 학생들과 수업을 시작하지만 뉴스를 시작으로 강의는 마무리 되고, 혼란스럽게 귀가하는 사람들 속으로 그녀도 섞인다.
온전한 삶은 스스로 비우고 스스로 무엇을 채우는가 사고한다. 영화 속 사회는 스스로 답을 찾지않은 채, 프레임을 구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사람들은 그 규격을 믿지 못해 혼란에 빠진다. 심지어 대화조차 서로의 신뢰를 놓은채, 경계선 안에서 사고한다. 루이스가 TV로 혼란한 사회와 국가의 제제를 뉴스로 접할 때, 웨버 대령이 등장한다. 웨버 대령의 첫 대사는 ‘사람들은 2일만에 우리에게 답을 원해요.’ 라는 토로다. 대중은 국가에 규격을 요구하면서, 규제에 항의한다.
이 사회는 세상를 주어진 화면으로 보고, 그 프레임으로 대화를 한다. 새장 속의 새는 그 새장이라는 공간이 전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생존여부마저 그 새장 속 새를 통해 묻는다. 리스크를 감수 할 수 없는 인간은 밖을 볼 수 있지만 갇혀있다. 하지만 루이스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가둔 이 프레임이 갑갑하다. 그녀는 리스크를 감수하며 껍질을 하나씩 벗는다. 편견없이 교감하기 위해 화이트보드에 쓰여진 생존이 보장 된 ‘FULL’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애벗과 코스텔로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맨 처음 건네는 글. HUMAN.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시공간과 사고는 연결과 분리가 가능하다. 마치 안과 밖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문을 닫는 순간 벽이 되고 안과 밖은 분리가 된다. 반면, 문을 열면 통로가 생기고, 통과를 하면 틀 밖의 시야보다 밀접해진다.
시간 차원도 그러하다. 현재는 있는 자리 일 뿐이다. 이동하는 순간 그 자리는 현재가 된다. 공간은 안과 밖, 왼쪽과 오른쪽 어디를 우위에 두지 않는다. 바늘이 있는 시계는 12 다음에 1이다. 한 바퀴가 돌면 1시가 되거나 13시가 된다. 23시에서 24시가 되면 다음날의 0시이기도 하다. 12와 1의 과정을 모든 사이에 빗대어 본다. 늘 익숙하게 새롭다.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삶이라는 틀을 선택하고 책임지는데 있다. 루이스는 결국 스스로 삶을 받아들인다.
이 작품은 틀 속에서 인생을 끼워넣기 급급한 이들에게 용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넘나들기를 권하고 있다. 기억(과거)에 집착하며 미래를 부정하고, 기준과 근거에 기대는 불안한 삶들에게 새장을 벗어나는 것을 응원하고 있다. 현실을 현재라는 틀로 가둔 채 한 점으로 인식하며 산다면 두려움이 생긴다. 그 두려움은 어리석음 부르고 지혜의 기회마저 잃을 수 있다. 삶은 리스크를 감수 할 용기가 필요하다.
프레임은 있으나 없다. 없으나 있다. 우리의 시야는 시공간의 어디를 어떻게 보며 어디로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