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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토 Jun 24. 2024

워킹맘의 고민

아들은 지금 남미에 선교사로 나가 있다. 선교지로 떠나기 전 코로나 기간에 독학으로 스페인어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다. 전공도 아닌 언어를 배워 원어민들과 의사소통도 원활하게 한다. 어릴 때 수줍음 많고 수치심에 민감했던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이 아들이 태어난 날 남편은 수술실 앞에서 아들 얼굴만 살짝 보고 서울로 떠났다.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가장한 얹힌 삶을 석 달하였다. 시골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의식하고 올라와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여인숙 쪽방에 얹혀살았다, 아들 생후 5개월이 갓 넘었을 때 빚 독촉하는 친척들의 성화로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직장을 구했다.     

밤근무를 일주일에 한 번 할 때마다 밤에 시어머니가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노고보다 나의 힘듦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한숨도 자지 못하는 밤근무 후 퇴근한 며느리에게 아이를 맡기는 시어머니가 못내 원망스럽기도 했다.     

돌이 지나면서 아들을 데리고 분가하였다. 시누이집에 얹혀사는 것으로 남의 집 살이는 장소만 옮겼을 뿐이다. 아침 일찍 7시에 출근해야 했으므로 아이 밥 먹일 시간도 없이 출근하기 바빴다. 이른 아침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어린이집에 특별히 사정하여 빨리 등교시켰다. 혼자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아들은 이때부터 부끄러움이 많아졌을까?     

부끄러움을 알아가고 창피함과 수치심을 알아갈 나이에 민감한 아이는 이미 자신의 처지를 알았나 보다. 유난히 사람들을 피하며 숨고 말만 걸어도 울어버리는 아이였다. 지인들이 집에 오면 구석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갈 때까지 나오지 않는 아이. 나는 타고난 성격이라고 치부해 버림으로써 아이의 상처를 애써 덮어버렸다.     

그 후 분가하여 상하방 월세살이를 전전하다 10평 남짓하는 주공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아들이 다섯 살 무렵, 아들이 아파서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 데려와 수액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아들은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혼자서 아무 말 없이 수액을 맞았다. 업무가 너무 바빠 주사 맞는 아들을 들여다보고 챙길 시간이 없었다. 바쁜 와중에 못내 걱정되어 아이를 보러 갔을 때 아들이 무표정하게 엄마를 쳐다봤다. 아들의 무감각한 표정이 가슴깊이 박혀있다.     

수줍음 많은 아들이 초등학교 가서 친구들을 잘 사귈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 초등학생 때 걱정과 다르게 곧잘 친구들을 데려오고 같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마음 한편에 쌓였던 응어리가 풀려나가는 듯했다. 문제는 중학생 때 터졌다. 아버지의 부재가 한참 사춘기를 겪는 남자아이들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부재로 남성성을 기를 기회가 없었다. 아들은 원치 않는 일로 친구에게 끌려다녔다. 속앓이를 한 아들은 엄마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사촌형에게 말함으로써 완력으로 해결하였다. 결국 학교 폭력위원회에 회부되어 고개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는 아들을 보며 남편을 원망하였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부모로서 죄책감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멀리 버스 타고 다니면서도 불평한마디 안 하는 아들이 안쓰러웠다. 컴퓨터에 빠져서 몇 시간이고 침묵하고 대화가 없어졌다. 가끔 보는 아버지의 혼냄에 송곳을 들고 대항하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대학을 가고 군대를 다녀왔다. 제대 후 방황은 지속되었고 자퇴를 하였다. 아들의 아픔 뒤에는 언제나 남편의 부재와 무능력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들이 선교하러 외국에 나가겠다고 말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요구하는 모습을 봤다. 당당해진 아들의 행동과 함께 자신감이 보였다. 신앙의 힘으로 살아갈 희망을 가진 아들이 대견했다. 아들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 인해 언제나 힘들어하고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보며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음에 좌절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엄마와 자신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힘이 생겼다고 한다.      

아이들을 키울 때 남편을 원망했는데 문제는 주 양육자인 나에게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남편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감정상태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나의 정서적인 불안정은 아이의 정서적인 불안정으로 연계되었다. 나의 눈물과 슬픔을 본 아들의 가슴에도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엄마의 삶을 대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아들에게 전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바르게 커 준 아들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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