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라기 노리코, 여자아이의 행진곡
*커버 이미지는 <이웃집 토토로> 메이. 이 시를 읽으면 메이의 씩씩한 발걸음이 떠오른다.
남자아이를 괴롭히는 게 좋다
남자아이를 빽빽거리게 만드는 게 좋다
오늘도 학교에서 지로의 머리를 때려 주었다
지로는 소리를 꺅 지르며 꽁지를 빼고 도망쳤다
지로의 머리는 돌머리
도시락통이 찌그러졌다
아빠는 말한다 의사인 아빠는 말한다
여자아이는 난폭하게 굴면 안 돼
몸 안에 소중한 방이 있거든
얌전히 있어 주렴 감싸 주렴
그런 방이 어디 있어
오늘 밤 탐험을 떠나야지
할머니는 화낸다 우메보시 할머니
생선을 깨끗하게 먹지 못하는 아이는 쫓겨난단다
시집을 가도 3일도 못 돼 소박맞는단다
머리와 꼬리만 남기고 깨끗하게 먹으렴
시집 안 갈 건데
생선 해골 보기 싫어
빵집 아저씨가 외친다
질겨진 건 여자와 양말 여자와 야앙말
아줌마들이 빵을 안고 웃는다
당연하지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예요
나도 강해져야지!
내일은 누구를 울려 줄까
이바라기 노리코, <여자아이의 행진곡>
<내가 가장 예뻤을 때>로 유명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집을 읽었을 때, 가장 먼저 필사한 작품이 이 시였다. 얼마나 귀엽고 깜찍한지. 여자아이라면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여자'아이에게 기대되는 젠더 롤Gender Role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시는 명확하고 경쾌하다.
"남자아이를 괴롭히는 게 좋다/남자아이를 빽빽거리게 만드는 게 좋다"는 저 당당함. 남자아이인 지로가 "꺅"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게 만드는 여자아이. 도시락통으로 머리통을 얼마나 세게 후려치면 도시락통이 찌그러질까. 2차 성징 이전 남자아이와 대등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싸우는 여자아이에게는 '조폭 마누라'라는 별명이 붙곤 했다. 아마 그것이 그 당시 가장 대표적인 '싸우는 여자', '강한 여자'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리라. 나도 조폭 마누라 소리를 들으면서 많이 싸우고 달리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여자아이는 주변의 걱정거리이다. "의사"인 아빠가 '친절하게' 딸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해 준다. 몸에 소중한 방, 포궁宮(자궁)이 있으니 고분고분하게 있어야 한다고. "얌전히 있어 주렴 감싸 주렴" 이라고 말하는 아빠의 말은 '상냥하다'. 여자아이는 아이가 아니라 예비 '어머니'라는 것을 다정히 교육시킨다. 그러나 "나"는 되묻는다. "그런 방이 어디 있어". 보이지도 않는 방. 중요한 것은 방이 아니라 방 안에 있는 존재이다. 아직 있지도 않으며 품을 수도 없는 어린이지만, 여자아이는 어린이이기 전에 '여자'아이로 취급된다. "나"는 위험한 "밤"에 "모험"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해 버린다. 세입자를 들일 생각조차 없으니까.
이번에는 채찍이 들린다. "우메보시 할머니"는 생선을 남김없이 먹는 알뜰하고 검소한 '아내'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며 "소박"을 들어 "나"를 위협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림없다. "시집 안 갈 건데/생선 해골 보기 싫어"라는 말로. '쫓겨날 수 있는' 것이 '아내'라면 그런 것쯤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잔소리 가득한 집에서 뛰쳐나오니 빵집 아저씨가 외친다. "질겨진 건 여자와 양말"이라고. '여자'가 아닌 '아줌마',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찌들은 비-여성으로서의 '아줌마'를 비꼬는 말에 아줌마들은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나"는 "질겨진"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다. "나도 강해져야지", "아줌마"들처럼 말이야. 내일은 또 누구-아무래도 남자아이겠지만-를 울려줄까 하는 저 당당함. 아주 씩씩하고 귀엽다.
그러나 이렇게 씩씩한 '조폭 마누라'는 자라 '여자'아이에서 '여'학생이 될 것이다. 여전히 씩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가 되거나 '어머니'가 되거나 '여직원'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남편'이 있는 '집 안'의 존재, 안-해, 아내가 되어서, 쫓겨나지 않도록 안달복달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문정희가 지적한 여학생들의 행방이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문정희, <그 많은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저건 다 옛말이지, 요즘엔 그런 게 어디 있어. 남자고 여자고 다 일 하고 살잖아. 여자들도 다 대학 가고 취직하고, 다 맞벌이 하는데 무슨 부엌이고 안방이고 갇혀 있다는 거야. 그건 우리 어머니 할머니 세대들이나 그런 거지. 물론 그럴 수 있다. 여자들도 일터에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내'가 된다면 말이 달라진다. 회사와 부엌과 안방을 동시에 경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은 하나인데 할 일은 여러 개이고, 일은 한꺼번에 밀려든다. '조폭'을 떼인 '여학생'들은 이제 '마누라'를 스스로 떼어 버린다. "큰 사무실 한켠에" 있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크고 넓은 세상에 끼"기 위해서는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더운 김을 쏘"일 만한 여유도 이유도 없다. 그것을 그저 "행복하게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마누라'를 선택하는 순간 '집'이 따라붙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손해 보기 싫어서>의 손해영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냥 회사에서 손해영 팀장이고 싶어."
"이미 팀장이에요."
"누구의 아내 말고. 들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네가 회사에서 아침을 먹잖아? 그럼 내가 무능해서야. 네가 옷을 거지같이 입지? 내가 무능해서라고. 네가 실수하잖아? 누가 무능해? 내가. 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야. 난 핵심 부서에서 핵심 인재로, 막, 눈부시게 성과를 내야 하는데,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거라고."
'아내'가 되는 순간 '팀장'은 뒤로 밀려난다. 다른 허물도 내 탓이 된다. 그것이 '여자'의 일이므로.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 무한 경쟁 자본주의에서 모래주머니까지 차는 것은 사양이다. 잘 해도 본전이고, 못 하면 손해인 것, 장애물 이상도 이하도 아닌 희생봉사를 굳이 감당하고 싶지 않다.
여자의 행복, 사랑하는 사람(남자)과 결혼해 닮은 아이를 낳고 살림을 꾸리고 일도 하고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고 손자도 보고 안락하고 안정적인 행복의 틀 안에서 존재하는 것. 마땅한 행복의 틀에서 벗어나는 행위는 행복의 형식을 제공하는 사회의 비난을 받는다. 그것은 부도덕하며 비윤리적이며 불행으로 가득한 삶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애도 안 낳고 개나 키운다는 비난이 온갖 언론사를 타고 흐른다.
우리는 행복을 아주 단순히 관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행복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관습에 도전하는 것이다. 관습이라는 단어는 “소집하다” (to convene)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관습을 따르는 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모이는 것, 집합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가족 형태의 재생산을 중심으로 뭉쳐지지 않는 여성들의 욕망에 시간과 공간을 부여한다. 결국 페미니스트들은 기꺼이 소란을 일으키겠다는 사람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심지어 고집을 부려야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주체의 의지가 다른 사람들의 의지, 즉 그 의지가 일반의지 또는 사회의지로 물화된 이들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을 때 고집스럽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성 트러블 메이커의 형상은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들의 형상과 동일한 지평을 공유한다. 두 형상 모두 행복의 역사라는 렌즈를 통해 해석하면 이해가 가능하다. 페미니스트는 행복을 약속하는 대상들이 그렇게 장밋빛이 아님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깰 수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그래서 불행으로 흠뻑 젖어있다.
사라 아흐메드, <행복의 약속>
마땅한, 관습적인, 행복에서 벗어난 존재와 행위. 기존의 가족을 깨뜨리겠다는 것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그것은 두려운 것이며, 보장되지 않았고, 실패와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일 수 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것은 결국 스스로 선택한 것인데.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던 여자아이는 말했다. 오늘 밤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그러므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씩씩하게, 전에 없던 행진곡을 연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