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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란 Nov 16. 2024

구해지고 싶지 않은 세상이 만든 2등 히어로, 마법소녀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이 책은 여자아이부터 소녀를 대상으로 한 대표 컨텐츠인 마법소녀의 실체를 문화·경제적 측면에서 분석한 글이다. 이 책을 읽으려는, 혹은 읽고 싶은 독자들은 아마 '마법소녀'를 알고, '마법소녀'를 꿈꿨으나 과연 이 꿈이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지 않을까. 남자아이의 영웅과 여자아이의 영웅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왜 다른가? 마왕을 무찌른 남자 용사(영웅)을 보고 남자아이들이 용사를 꿈꾸거나 이를 계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마왕을 무찌른 여자 용사(영웅)인 마법소녀를 꿈꾸는 것은 왜 부자연스러운가? 왜 마법소녀는 본질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을까?


 요지는 이것이다. 어린이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21세기로 진입하면서 컨텐츠의 영향력은 막강해졌고, 그 컨텐츠를 만드는 것은 어른들이며, 어른들은 컨텐츠로 돈을 벌고 싶고, 이 욕망이 구시대적 성차별 인식을 바탕으로 한 컨텐츠와 결합하면서 '2등 히어로'인 마법소녀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구시대적 성차별 인식은 무엇인가? 만들어진 사회적 성, '여성성'을 여자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세분화하며 자기화하게 함으로써 기존 사회를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마법소녀'에 대한 여성의 양가감정이 피어오른다. 나는 보다 자유롭고 싶은 여성으로서 기존의 성 관념에 조응하는 '마법소녀'를 좋아해도 되는 것일까? 마법소녀는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스크린 안에서 예쁘고 반짝이고 매끈한 몸으로 요술봉을 휘두르는데 왜 지금의 나는 마법소녀가 마냥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전직 마법소녀 지망생이자 책임 있는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분명해질 수밖에 없다. 후세대의 여자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마법소녀를 상상하는 것, 그리고 그 마법소녀를 여자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것. 그 과정에서 현실과 환상(컨텐츠)의 괴리를 줄이려는 노력이 동반될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은 환상을 벗어나서도 현실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다. 안전한 환상 안에서 허우적대봤자 남는 것은 현실 격차로 인한 상처와, 더 극단적으로는 그것이 상처인 줄도 모르는 무지일테니 말이다.


[40] 저명한 페미니스트 연구자인 안젤라 맥로비[41]와 제니 가버는 1977년 논문 「소녀와 하위문화Gilrs and subculture」에서 양육자들이 딸들에 대해 보다 방어적, 보호적으로 구는 경향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공격·폭행·범죄 등 딸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사회적 위협이 그 원인이었지요. (…) 

 공포스러운 상황이니만큼 양육자들은 자신의 아이가 '소녀를 위한, 소녀에 의한, 소녀의' 프랜차이즈인 디즈니 프린세스를 소비하는 것을 보며 안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디즈니 프린세스에 푹 빠져 있는 동안에는, 사방에 놓인 성적 위협을 피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

 [42]하지만 디즈니 프린세스 콘텐츠를 통해 소녀 소비자들이 사회적 조숙, 성적 대상화, 아동 성범죄 등 실질적인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녀들이 처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디즈니 프린세스 콘텐츠를 소비하게 된 원인만을 설명해줄 뿐,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혹시 소녀 소비자들과 그 양육자들이 여성과 아동에 대한 사회적인 혐오 때문에, 오히려 선택의 여지 없이 시장 한구석으로 격리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40-41쪽.


 물론 그깟 애니메이션이나 캐릭터 상품 하나로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흔들리는 상황이 오겠느냐는 생각도 할 수 있으나, 요한 하위징아에 의하면 '놀이'란 문명의 근간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놀이의 두 가지 핵심 요소는 자유와 규칙 체계에 있다. 언제든 자의로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를 가지며,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와해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요한 하위징아, 이종인 역,『호모 루덴스』, 연암서가, 2018, 21-42쪽.) 그러므로 강력한 '놀이'의 판을 구시대적 발상으로 깔아버린다면 결국 구시대적 발상을 반복하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오히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 든다.)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이래야 해, 하는 규칙을 지켜야먄 이 놀이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은 이 규칙대로 너희의 세상을 만들라는 명령과도 같다.


[67]1991년에 게임 캐릭터 성비 및 성역할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비디오게[68]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92%가 남성 캐릭터였습니다. 여성 캐릭터는 8%뿐이었고, 그중 6%가 남성 캐릭터들이 구출하고 쟁취해야만 하는 목표이자 보상 격의 캐릭터, 일명 '붙잡힌 공주(Damsel in Distress)'였습니다. 때문에 여자아이를 배제하는 한편 남자아이로 하여금 여성혐오를 체득하게 한다는 점에서 게임문화는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67-68쪽.


 [72] 이미 1960년대부터 많은 연구자가 아이들이 사회화(혹은 문화화)하는데 있어 장난감과 책, 미디어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안젤라 맥로비는 [73] 아주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출판물조차 그 대상이 여자아이일 경우 로맨스나 미용, 요리, 패션만을 다루는 반면 남자아이일 경우 스포츠나 직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다고 1970년대에 지적한 바 있고요. 성별에 따라 색상이 지정된 제품들, 출연자를 폭넓게 섭외하지 못한 어린이 프로그램, 관습적으로 특정 성별만을 노린 광고 등이 '어떤 성별에게 무엇이 적절한가'에 관해 아이들에게 아주 명확한 신호를 주고 있던 셈입니다.

 당연히 연구자들은 이미 규범화된 시장을 근거로 삼는 접근법은 마케터들이 소녀문화의 가장 정형화된 측면만을 접도록 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낡고 편향된 제품을 낳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기술사회학자들이나 아동인권 운동가들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MIT의 셰리 터클 교수는 1997년 <나이트라인nightline>에서 "만약 여러분이 모두에게 더 포괄적인 컴퓨터 문화를 창조하려 들지 않고 그저 오래된 고정관념에 따라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마케팅한다면, 단지 오래된 고정관념을 강화할 뿐입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3년까지도 미디어 및 게임 제작자, 장난감 제조 업체에 의해 강화되는 성차별이 사회에서 전통적인 성역할 구분을 유지하는 [74] 역할을 한다며 어린이와 그 가족들이 완구와 게임의 상업화 및 마케팅에 점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에 우려를 표한 바 있지요.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72-74쪽.


 가장 오래되고 멍청한 믿음 중 하나는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기에 객관적이다'라는 것이다. 허나 위 글과 마찬가지로 이미 존재하는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진행하는 멍청한 기업 행위가 얼마나 많은가. 점수를 조작해가며 여성을 떨어뜨리는 사/공기업은 말할 것도 없으며, 만날천날 고령화 사회가 도래한다고 종말론자처럼 소리를 질러대면서 장~노년층을 소비자로 보지 않는 기업들이 부지기수다. 오만데 깔린 키오스크를 보라. 비장애인/청년층만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키오스크 때문에 놓친 소비자가 몇 명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이처럼 게으르고 낡은 태도는 현실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있는 고정관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방식이나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객관성이나 효율 외치는 사람 중에서 진정으로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성차별적 고정관념 때문에 나타나는 웃지 못할 상황은 무엇인가 하면, 남자아이들은 소녀가 주역인 콘텐츠를 선호하지 않지만, 소녀들은 누가 주역이든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자아이는 '주인공'은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하고, 여자아이들도 '주인공'이 남자인 콘텐츠를 자주 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이런 태도는 여타 컨텐츠에서도 발견된다.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면 이입이 안 돼서 못 하겠다는 남성 게이머들이나 독자들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현실도 그러한가? 오히려 '실제로' '객관적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완구 시장 규모는 여자아이 쪽이 더 크다. 그럼에도 왜 남자아이(라는 고정관념)를 중심으로 한 시장이 지속되는가? 기존에 존재하는 보편 시장으로부터 소비자를 분리하는 시장 세분화(Market Segmentation)는 소비자를 상품에 맞추는 전략에 가깝기 때문이다.


 [85]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소비자로 키워지는가!The Material Child: Growing up in Consumer Culture』의 저자 데이비드 버킹엄에 의하면 시장 세분화는 소비자를 상품에 맞추는 전략에 가깝다고 합니다. 소비자 개개인의 [86] 개성과 취향이 자신이 속한 카테고리에 서서히 맞춰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취향을 직접 구축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맙니다.

 소비자가 아동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색' '여자색'을 구분하지 않는 어린아이들에게 하늘색 남아 용품과, 분홍색 여아 용품으로 나뉜 시장을 보여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이들은 빠르게 '하늘색은 남자색'이라고 학습합니다. 이런 일이 성장 과정에서 수년간 반복되다 보면 하늘색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여자아이들조차 하늘색 상품을 포기하게 됩니다. 관습에 따라 분할된 시장이 아직 명확히 자리잡지 않은 아이들의 기호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요.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85-86쪽.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시장은 미래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시장은 현재를 설계하고 그에 맞게 움직이도록 한다. 성인이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1970년대에 임의로 만든 44/55/66 사이즈를 2022년까지 사용하고, '프리사이즈'를 작게 만든 뒤 그 안에 몸을 맞추도록 하면 그뿐이다. '프리사이즈조차 안 맞는 몸'으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자유롭지 않은' 주체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던 '마법소녀' 또한 바로 이 '시장 세분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며, 이것이 우리가 마법소녀에게 지니는 양가감정의 근원이다. 마법소녀는 자유롭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87] 그렇습니다. 마법소녀는 자연스럽게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시장과 마케터들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졌지요. <요술공주 샐리>는 처음부터 다른 애니메이션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샐리에겐 맞서 싸워야 할 적도, 함께 싸울 동료도 없습니다. 마법의 힘을 지녔어도 슈퍼 파워를 가진 여느 소년 주인공들과 같은 수는 없었습니다. 소년이 아닌 소녀이기에, 소년과 같으면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소년 만화 작가 중 한 사람인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손에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샐리의 마술은 친구를 돕거나 집안 문데를 해결하는 데에 그칩니다. 자연스레 <요술공주 샐리>의 스토리 또한 영웅적인 모험 이야기보다는 삽화적인 코미디에 가까워지게 되었고요.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85-87쪽.


 [90] 남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단지 그뿐, 이후의 성인기까지 남자아이들과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체득한 '교육'이라는 마법과도 같은 힘을 뽑내는 일은, 1960년대 일본 소녀들에겐 아직 이상에 불과했습니다.

 최초의 마법소녀 애니메이션인 <요술공주 샐리>가 지닌 역설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다른 소년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샐리에게도 인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마법의 힘이 있었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이를 들키는 순간 샐리는 성인 여성이 되어 가정적 의무로 가득찬 세상에 속하게 되고, 몰래 간직하고 있던 힘과 자유를 빼앗기고 말지요. 이러한 설정은 후대 마법소녀 애니메이션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주인공이 성인 여성이 아닌 '소녀'일 때만 영웅의 힘을 누릴 수 있다는 마법소녀들의 암묵적 규칙 역시 바로 이런 <요술공주 샐리>의 역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90쪽.


 물론 최근 들어 악과 싸우는 영웅적 마법소녀들 또한 등장하고 있다. <프리큐어> 시리즈에서는 물리적 마법으로, 즉 초인적인 신체능력으로 악당들을 박살내는 마법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마법소녀는 '소녀'일 때에만, 즉 '어리고 예쁠' 때에만 힘을 지닌다는 한계에 봉착해 있다. 수많은 마법소녀들이 힘을 얻는 것은 '아름다움'에서이며, 그 '아름다움'이란 사회적 관념에서 비롯된다. 즉 '마법소녀'의 '마법'이란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립스틱, 아이섀도우, 볼터치 화장품을 마법용품으로 들이밀며 돈을 긁어모으려는 시장과 마케터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여자아이'를 '여성'으로 '만드는' 마법. 놀랍고도 끔찍하지 않은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성차별적 관념에 의해서. '사람'이 아닌 '여성'으로 만들어질 뿐이다. 어려서는 2D '마법소녀'로, 커서는 3D '여자 아이돌'이 지닌 '아름다움'이 곧 영웅적 '힘'이자 '마법'이라고 인식하면서 '여성'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릴 수 있다. 세상은 마법소녀에게 구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해결할 의지가 없으니 문제는 영영 해결되지 않는다. 박조열의 희곡 「목이 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주인공이 부재하는 이유도 이와 동일하다. 이 희곡은 우화로 제시되며,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주인공인 '대장'들이 등장하지 않으면서 등장인물 A와 B는 영원한 갈등과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된다. 박조열은 왜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다가 꿈을 꾸게 되고, 이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


 그러던 중 얼마 전 꿈속에서의 일이다. 나는 생면부지인 두 사람과 마주 앉아 있었다. 아마 대서소의 대기실이었던 것 같다. (…) 아무튼 그곳에서 나는 이 두 사람과 매우 상징적인 대화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나: 당신들은 무슨 일로 오셨소?
갑: 저 사람에게 물어보시오.
나: 당신들은 무슨 일로 오셨소?
을: 저 사람에게 물어보시오.

 꿈속에서는 비약과 통찰이 지극히 쉽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나는 홀연히, 이 두 사람이야말로 그 대장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과 나눈 대화의 전부이다. (…)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들과 나눈 저 짧은 대화의 의미만이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드디어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우화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때 그들의 거만하고 음울하고 회피적인 표정과 말투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꿈속에서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에게서 저 대화 이상의 얘기는 한마디도 나눌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들의 누락으로 해서 이 우화의 소개를 주저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박조열, 『흰둥이의 방문: 박조열 단막극집』, 연극과인간, 2009, 35-36쪽.


 그렇다. 세상은 마법소녀에게 구해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이 세상을 유지하고 싶었으므로,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부품으로 만들어진 '2등 히어로' 마법소녀는 세상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법봉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예쁘게 변신하면 변신할수록 마법소녀는 진짜 흑막인 세상 앞에서 오히려 약해질 뿐이다. 그러니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한다. '2등 히어로'로서 '2등 시민'을 생산해 버리고 마는 과거-현재의 마법소녀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 이 책에서는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아이돌, 소녀소설과 같은 소녀 대상 컨텐츠를 다루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도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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