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
복종이 행복이라고,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하"다는 말을 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글을 만해 한용운이 썼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시란 스치듯 읽으면 안 된다는 것, 시란 시인과 그의 생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 각 작품은 다른 작품과 또다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복종>은 보여 준다. <복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님의 침묵>의 서문인 <군말>을 먼저 읽어야 한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부처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
한용운, <군말>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다는 그의 "복종"은 복종의 사전적 의미를 빗겨나간다. 복종 자체에 복종하는 자는 복종할 수만 있다면 주인이 누구인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는 그야말로 노예를 말하는 것일 테다. 이러한 복종은 이미 습관화된 것이자 역사화된 것으로, 비판적 태도가 결여됨을 전제한다.
인간들 사이에 지금까지는 복종이 가장 잘, 그리고 긴 세월동안 이루어지고 훈련되어왔다. 모든 평범한 인간은 어떤 형식적 양심으로 “그대 무엇을 무조건 행하라. 무조건 행하지 말라” 라는 타고난 욕구를 갖고 있다. 이런 욕구는 만족을 찾고, 그 형식을 어떤 내용으로써 충족시키려 한다. 그리하여 분별없이 게걸스럽게 손을 내밀어서,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 부모건, 교사건, 법률이건, 계급적 편견이건간에 그 말하는 바를 받아들인다. 인류의 발견은 이상하리만큼 제한되어 있고, 주저하고 완만한 것이며, 자주 역행하고 회전하는데, 그 이유는 복종이라는 무리의 본능이 가장 잘 유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니체, <복종의 본능과 도덕적 위선>
"나"는 "그대 무엇을 무조건 행하라, 무조건 행하지 말라"는 명령에 순응하지 않는다. 니체가 비판한 노예적 근성이 무리에 소속되고자 하는 나약한 본능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나"는 "자유를 사랑한다"는 "남들"의 말에 말에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고독한 불복종으로서의 복종, 오직 "당신"에 대한 복종만을 이어간다. 당시 '자유연애'가 근대의 지표로서 번쩍이고 모두가 그것을 따를 때 이를 피하는 "나"의 모습은 <군말>에서의 일갈을 상기시킨다.
"알뜰한 구속"을 받는 "너희"의 "이름 좋은 자유"는 오히려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당신", 만해의 "님", "자유"이자 "나를 사랑하"는 "님". 이 "님"이야말로 나의 "그림자"가 아닌 완전한 타자이자 자유이다. 즉, "타자"와 "자유"에 복종하고자 하는 만해의 "복종"이란 언어적으로 창의적인 것, 즉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