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인공지능,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로봇. 최근 몇 년 사이에 특이점과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면서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로봇)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로봇이 애정의 대상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과 미묘하게 닮았으면서 닮지 않은 로봇에 대한 이유 모를 불쾌감을 이르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은 점차 극복되는 듯하다.
불쾌한 골짜기의 원인이 미숙한 로봇 구현 실력이라는 말도 있고, 단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Z세대들은 3D 이미지로 구성된 로봇에 대하여 거부감을 보이지 않으며, 제페토 같은 앱을 통해 스스로를 3D화하는 데에도 거부감이 없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그녀>는 2014년보다 최근에 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2019년에 재개봉한 것도 시대적 흐름에 힘입은 덕이 컸으리라. 대필 작가 테오도르가 아내와 별거 중에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내용의 <그녀>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AI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주제는, 그리고 그것이 매우 로맨틱하게 그려진다는 것은 AI와의 사랑을 현실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예술은 언제나 한 발자국 앞서 가니까.
2021년에는 아예 AI 남친/여친을 만드는 앱 <가상남녀>가 등장했다. 현재는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월 평균 이용자가 3만명이 넘었던 적도 있다고 하니 상당히 흥행했던 듯하다. 사용자가 원하는 얼굴과 목소리, 말투를 설정할 수 있고, 프로필을 설정하면 일상 대화나 끝말잇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입맛대로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AI가 발달하면서 기술 윤리와 더불어 AI 관련 윤리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AI와의 사랑은 가능한가?'라는 주제가 주 토론 주제로 오르내리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자, 그러면 인간은 AI와 사랑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사실 대상은 누구든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데에 허락이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그러니 당신은 AI와 사랑할 수 있다. 다만 '당신이 거절당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애초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나'가 아닌 '타자'를 대상으로 한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말도, 사랑으로 인한 수많이 비극도 거기에서 비롯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라는 사실에서 말이다. 사랑을 할 수록 성숙해지는 이유는 '나'가 아닌 '타자' 때문이다. '나'라는 질서로 균형잡힌 세계는 '타자'인 '너' 때문에 균열이 생긴다. 바로 이 균열, '나'가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성찰을 가능케 하는 고통이 인간을 성장하게 만든다.
상처받으려고 사랑하는 거 아닌데요?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세상에 나를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있는 타자란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나를 받아 주고 달래 주고 무조건 이해해 주고… 그건 자신을 갓난아기처럼 다루어 달라는 태도다. 거울을 보고 열심히 입맞추는 나르키소스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내 취향에 맞는 얼굴의 내가 나를 달래 주었으면 좋겠다는, 자기위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AI와의 사랑이란, 가능하다. 다만 이 때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AI는 상대방 인간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대를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한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타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에게서 나를 상처 줄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은 상대를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그녀>의 테오도르가 '당신에게 귀 기울여주고 당신을 이해해 주고 당신을 알아줄 존재'라는 광고 카피에 이끌려 사만다를 선택해서 구입했다는 점,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위해 새벽이나 낮이나 밤이나 늘 대기해야만 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그들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다.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타자의 다름, 즉 타자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타자성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근원적 거리"가 없다면 타자는 너가 아니다. 타자는 그것으로 사물화된다. 타자는 그 다름 속에서 호출되는 대신 소유된다.
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 75쪽.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이미 차고 넘쳐난다. '너는 왜 내 마음대로 따르지 않지?', '너는 왜 내가 하는 말에 반박하지?',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지?'라는 비대한 자아, 심각한 나르시스트들로 인해 변질된 '사랑'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가 '타자'임을 견디지 못하는 미숙한 이기심으로 인해 애꿎은 '타자'들은 죽어 간다. '왜 안 만나줘'로 요약되는 폭력과 살인은 매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AI와의 사랑을 허하라는 이야기는 낯설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야기이다. 다만 그것이 '사랑'일 경우, 거절당하고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한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이는 '인간과 같은 인지능력을 지닌 AI는 인간과 동등하다고 볼 수 있는가?'의 논의와도 이어진다. 물론이다. 동등해야만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좋다는 것은 말하고 움직이는 러브돌이 필요하다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결벽증, 강박증, 괴팍한 성미라는 삼박자를 갖춘 남자 소설가가 싱글맘을 사랑하게 되면서 건넨 고백은 사랑이란 무엇인지 잘 드러내주는 대사이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내가 알 수 없는 타자, 파악할 수 없는 타자,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초라해진다. 타자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매무새를 정돈한다. 안절부절못하는 사랑의 감각, 그것은 눈을 돌려 창 밖만 봐도 알 수 있다. 구애의 춤을 추고 깃을 정돈하는 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면 누군가는 대체 AI를 사랑하는 '메리트'가 무엇인지 물을 수도 있겠다. 글쎄, 내 취향의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 대상에게 구애할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도해 볼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