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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란 Nov 22. 2024

상상력이 필요 없는 상상

송경동,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feat. 전태일의료센터)

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 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또 뭐라고 써야 하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잘린 손가락과 발들을 위로하면 될까
강압으로 목과 허리에서 탈출한 디스크 추간판들을 위로하면 될까
모든 부러진 뼈, 찢어진 눈, 터진 머리, 이완된 근육
닳아진 무릎, 손상된 폐를 위무하면 될까
압사, 추락사, 감전사, 질식사, 쇼크사, 심근경색, 유기용제 중독으로
하루에 여덟 명씩 일수 붓듯 착실하게 죽어 간다는
모든 산재 열사들을 추모하면 될까

식당 아줌마, 중국집 배달부, 퀵서비스, 가사 노동
모든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에게도
180만 특수 고용 노동자들에게도
영세 농민에 불과한 농업 노동자들에게도
산업 폐기물이 된 노령인들에게도
산재 보험을 적용해 달라고 간구하면 될까
산재 민간 감시원을, 산재 요양 기간과 적용 범위를 좀 더 늘려달라고
산재 주무 기관을 좀 더 민주화시켜 달라고 청원하면 될까

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을 써 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전문직 종사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내 아내에게는 내 아이에게는 산재가 없을까
사랑하는 사이에는 산재가 없을까
신체가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잘리는 것만이 산재일까
비정규직으로, 실업으로 쫓겨나는 것은 산재 아닐까
쪼들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은 산재가 아닐까

나의 모든 시도 실상은 산재시다
내가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모든 형태의 산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 세계에 대한 항의다
내가 자연을 그리워할 때 그것은
모든 조화로움으로부터 쫓겨난
근본적인 산재에 대한 항변이다

보라, 저 거리에 나온 모든 상품들도
불구의 몸으로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거리에 선 모든 나무들도
팔다리 잘리며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들녘 강물의 모든 실핏줄들도
검은 가래에 막혀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하늘 위에서 내리는 모든 눈도 비도
산재에 물들어 있고, 보라
저 하늘의 오존층도 우리의 폐처럼
숭숭 구멍 뚫리고 있다

이 모든 산재를 보상하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이 모든 산재를 지속 가능한 상태로 되돌리라고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누구에게? 저 자본에게
우리의 잘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아
닳아진 무릎뼈와 폐혈관과 혼미해진 정신을 모아
배부른 저 자본에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이윤이 중심이 아니라
건강과 안전과 평화와 연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가장 악독한 산재, 이 눈먼 자본주의를 추방해야 한다고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인 착취와 소외의 세계화를 막아야 한다고
모든 사랑스런 관계들을 파탄으로 내모는
이 불안정한 세계를 근절해야 한다고

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 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자본주의를 추방하지 않고
산업 재해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들

송경동,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중세에 일이란 신의 형벌이자 속죄의 도구였으며, 현대에는 자아 실현의 도구로 작동한다. 이런저런 말을 붙이지 않아도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스스로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런데 왜 살아가기 위한 일을 하다가 다치고 죽는가? 어불성설이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꾸역꾸역 일을 하러 나선다. 월요병을 앓으면서도, 번아웃에 시달리면서도.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의 시인은 지쳐 있다. "또 뭐라고 써야 하지/무슨 말을 할 수 있지". "또"라니. 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이 산재 추방의 날과 같다니. 추모가 끝없이 나타난다니. 어째서일까. 일은 왜 정도를 넘어 고통스럽고 피로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걸까? '산재'라는 말은 왜 '특수한' 직종에만 연결되는 것만 같을까? '위험한' 일과 '위험하지 않은' 일을 구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묻는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전문직 종사자들은 산재가 없을까/내 아내에게는 내 아이에게는 산재가 없을까/사랑하는 사이에는 산재가 없을까/신체가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잘리는 것만이 산재일까/비정규직으로, 실업으로 쫓겨나는 것은 산재가 아닐까/쪼들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은 산재가 아닐까" 라고. 힘든 일, 몸 쓰는 일, 위험한 일, 싼 일… 하나하나 구분해 놓고 나면 나는 그 위험한 바운더리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러면 안전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니까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일을 하다 죽는다. "이윤이 중심"인 자본의 논리에 따른다면 안전 장비를 덜 구비해도, 두 명이서 해야 할 일을 한 명이서 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이윤이니까. 그 이윤의 논리에 들어가서, 그 논리를 두려워하면서 굴복하면 어떻게 될까?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고, 위험하고 더럽지 않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결국 '남의 일'이 되면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정말로 그럴까?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좋은 일'은 정말 안전할까?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한다. 세계 밖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건 어떨까. 우리는 일을 왜 하는가?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그러니 일에 있어 삶이 우선시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세계를 새롭게 상상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일하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일하다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상상력이 필요 없는 상상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노동에 대해 쓰고 말하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어서, 밤중에 인터넷을 유영하다가 녹색병원이 전태일병원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후원을 받는다는 것을 보고 작게나마 후원했다. 병원이 무사히 완공되어 나중에 내 이름을 전태일병원에서 발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전태일의료센터 기부 페이지: https://taeilhospita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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