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엄마란 무엇인가
엄마는 나를 두 번 배신했다
첫번째는 세상에 나를 낳아서
두번째는 세상에 나를 두고 가버려서
엄마가 죽기 전 나는 이미
배신자의 배신자가 되어 있었다
배신자의 기저귀를 갈아드린다
두 팔에 안고 진정제처럼 안아드린다
팬티를 치켜올린다
엄마! 왜 이래? 이건 아니야! 소리친다
눈물을 닦아드린다
떼쓰지 마! 꾸짖어드린다
이제 무게밖에 남지 않은 배신자에게
쓰라린 내 가슴을 한 술 두 술 먹여드린다
이제 이 배신자를 키워서 시집도 보내야지 마음먹는다
아빠에게는 두 번 다시 안 보내 단호하게 생각한다
마주 앉아 서로에게 뿌리를 내린 채
나뭇가지를 얽었으니 한정 없이 매년 이파리를 쏟았으니
(새는 알을 낳을 때 통증을 느낄까?)
(새는 날개를 펄럭일 때 통증을 느낄까?)
배신자의 배신자가 되어 엄마엄마 불러보니
엄마라는 단어에는 돌고 돈다는 뜻이 있다
(시계 안에서 째깍째깍 엄마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엄마는 축지법을 쓴다 엄마가 초침처럼 나를 찌른다
그렇게 엄마는 내 앞에 괘종시계처럼 늘 있었다
시간은 나를 늘 엿봤다
나를 낳지 말란 말이야
내가 시간의 손깍지를 푼다
노을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내가 내 따귀를 갈긴다
결국 엄마는 나를 두 번 배신했다
첫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낳아서
두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두고 가버려서
(왜 신생아는 태어나서 새끼를 빼앗기고 만 어미 새처럼 울까?)
이윽고 나도 엄마를 두 번 배신하게 되었다
첫번째는 엄마 조심히 가 하고 죽은 엄마를 낳아서
두번째는 나만 남아서
김혜순, <엄마란 무엇인가>
김혜순 시인의 묵직한 시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은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늙은 엄마로 꽉 차 있다. 환경도 우주도 모두 엄마다. 박살나고 있는 지구도 죽음 직전의 환경도 호스피스 병동에 누워 있는 엄마로 전유된다. 딸은 엄마를 돈다. 행성처럼 돈다. 어쩔 수 없는 중력의 법칙처럼, 세계의 규칙처럼.
엄마는 살아 있는 고향이다. 거울만 바라보아도 흔적을 들키는 뿌리다. 설사 한 군데도 닮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성이라는 같은 몸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엄마는 딸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지? 엄마 엄마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는 나는 어떡하지? 나도 같은 고민을 갖고 있다.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을까 봐 걱정이다. 갑자기가 아니라도, 엄마가 눕게 되면, 다시는 못 일어나는 죽음의 단계를 밟게 되면? 그러면 나는 어쩌지? 엄마, 나 어떡해? 하고 물어봐도 답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 생각만 해도 우주에 버려진 것만 같다.
그렇다. 그러므로 엄마는 배신자이다. "첫번째는 나를 세상에 낳아서/두번째는 세상에 나를 두고 가버려서". 나를 영영 외롭게 하는 것은 나를 세상에 낳아준 엄마다. 그리고 나는, 딸은, 아마도 늙어서 다시 어려지는-딸의 딸이 되는 엄마를 돌보아야 한다. 엄마가 나의 딸이 되면서,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된다. "배신자의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엄마는 내 기저귀를 갈아 주고 안아 주었지만 나는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진정제처럼 안아드"려야 한다. 작아지고 가벼워져서 아기가 되었지만, 내가 돌보아야 하는 딸이 되었지만 엄마는 엄마니까.
작고 여린 엄마. 아기처럼 줄어든 엄마. 다시 예전처럼 커졌으면. 어른이 되었으면. 나는 "이 배신자를 키워서 시집도 보내야지 마음먹는다". 하지만 "아빠에게는 두번 다시 안 보내"겠다고 마음먹는다. 엄마 왜 아기가 되었어? 다시 쑥쑥 자라나. 다시 어른이 돼. 그리고 아빠랑 결혼하지 마. 나 낳지 마. 엄마에게 다른 인생을 쥐어주고 싶은 것은 딸이 가지는 바람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사랑하니까 나 안 낳아도 돼. 그러니 엄마를 향한 딸의 사랑은 언제나 자기파괴다.
새는 자유로워 보인다. 엄마는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엄마는 땅에 묶인 새 같다. 새가 날지 못하는 이유는 알에 날개가 없기 때문일까? 그러니 생각한다. "새는 알을 낳을 때 통증을 느낄까?/새는 날개를 펄럭일 때 통증을 느낄까?" 새는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을까? 엄마라는 단어는 왜 족쇄에 매인 것만 같을까? 내가 엄마를 낳아서 엄마가 딸이 되면 엄마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엄마는 나를 낳고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되고 그러면 엄마는 다시 내 엄마가 되고 나는 또 다시 엄마의 엄마가 되고……이 사랑의 굴레는 좀처럼 서로를 놔주지 않는다. 그러니 "엄마라는 단어에는 돌고 돈다는 뜻이 있다." 그러니 "신생아는 태어나서 새끼를 빼앗기고 만 어미 새처럼 울까?"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를 수밖에.
결국 엄마는 나를 두 번 배신한다. 세상에 나를 낳고 나를 두고 가버려서. 세상에 죽음을 낳고 죽음을 두고 가버려서.
그렇지만 나도 엄마를 배신한다. 엄마 조심히 가 하고 죽은 엄마를 낳아서, 그리고 나만 남아서.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서 먼저 떠나는 건 배신이다.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서 혼자 남는 것도 배신이다. 그렇지만 이 사랑에는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엄마는 나를 낳고 나도 엄마를 낳아야 하니까. 그러니 서로의 배신은 조금쯤 참아 주어야 한다. 엄마가 죽으면 나는 누굴 돌지? 엄마의 궤도를 따라 돌 것이다. 그 궤도는 나의 궤도이기도 하다. 우리 둘이서 새겨온 궤도를, 언젠가 함께 돌 교점을 기다리면서 나는 오랫동안 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