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반성 608
어릴 적의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엔
못으로 긁은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主는
나를 놓아주신다
김영승, <반성 608>
벌레는 징그럽다. 흉도 징그럽다. 그렇다면 흉을 지닌 벌레는 얼마나 징그러울까.
어릴 적 어느 여름날 "나"는 풍뎅이를 잡는다. 푸르게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갑충. 풍뎅이의 껍질에는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다. 깊은 흉터는 징그러워서, "나"는 풍뎅이를 놓아주었다. 아마 얼굴을 찌푸리며, 몸서리를 치며, 손을 털며 풍뎅이를 거진 집어던졌으리라.
한편으로는 "못으로 긁은 듯한" 상처라면, 못을 쥐고 긁은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 게 무엇인가. 저 갑충은 징그러운 상처를 지녔는데. 그럼에도 꾸역구역 여러 다리를 버둥대는 모습은 "나"에게 견디기 힘든 혐오감을 주기에 충분한데.
그 풍뎅이, 징그럽고 상처 입은 갑충, 내가 버렸던 벌레, 그 벌레를 갑작스럽게 떠올렸던 까닭은 3연에서 등장한다. "나는 이제/만신창이가 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 아, 내가 바로 그 때 풍뎅이였구나. 내가 그 징그러운 풍뎅이를 놔준 것처럼, 주主도 망가진 나를 놓아주는 것이구나.
"나"는 누군가가 "못으로 긁은" 갑충. 징그럽고 손대고 싶지 않은 벌레. 주의 우편에도 좌편에도 발밑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는 불가촉의 존재.
그러나 "나"는 주의 수집품 외에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여름날 놓아 주었던 풍뎅이, 상이군인 같은 갑충은 여전히 갑주를 입은 채로 떠나갔다. 흉은 상처를 이겨낸 흔적이다. 만신창이에 징그러운 갑충은 그 여름날을 끝내 살아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꽤 괜찮지 않은가. 흉측한 갑충일지라도, 여전히 날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