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유년의 추억 속 선생님과 아버지
“와, 깨어났어! 살았나 보다!”
눈을 떠보니 내 주변으로 또래 아이들이 웅성거렸고 걱정스레 내려다보시는 아버지 얼굴이 보였다.
“숙아, 괜찮나? 내가 누군지 알겠나?”
그 옆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놀란 표정의 담임선생님도 계셨다.
내 나이 12살, 초등학교 5학년 가을이었다. 아마도 가을운동회가 있었던 날로 기억된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친구들과 교실에서 잠깐 숨바꼭질 놀이를 하며 놀았다. 술래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열 번 외치는 동안 나와 친구들은 흩어져 숨기 바빴다. 교실을 중심으로 모두들 빠른 속도로 숨고 있었다. 나는 아직 적당히 숨을 곳을 찾지 못했는데 이런 소리가 들렸다.
‘야, 이제 마지막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아찔한 외침이었다.
살다 보면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왜 그랬을까. 창문을 열고 그대로 두 발을 내디뎠다. 창문을 열면 당연히 난간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교실 창문을 힘껏 열었다는 기억만 생생했다. 우리 교실은 학교 본관 2층인데 아파트 3층 정도의 높이였다. 내 몸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이들은 혼비백산하여 선생님을 부르며 내가 떨어진 곳으로 뛰어내려왔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니 학교 선생님들의 기숙사였다. 보건소에서 의사 선생님도 다녀가셨다. 담임선생님의 걱정 어린 모습은 아직도 또렷하다. 놀라운 것은 가끔 두통이 생기긴 했지만 큰 외상은 없었다. 귀신이 밀었다, 머리를 많이 다쳤다는 둥 온갖 소문이 있었다. 한 달 정도 학교를 쉬면서 안정을 취했고 그동안 담임선생님이 매일 집에 들러주셨다. 낙타표 문화연필 몇 자루와 노트를 주시면서 속히 회복해서 학교에 출석하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까만 얼굴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서 환하게 웃어주신 고마우신 윤순봉 선생님. 모든 게 내 잘못인데 선생님께서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선생님이 생각나는데 안부를 알 수 없어 안타깝다.
그날은 선장이신 아버지가 보름달이 밝으면 집으로 오시는 월명시가 끝나는 날이었다. 다시 배를 타러 떠나시는 걸음 위에 큰딸이 걱정만 안겨 드린 셈이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어부들의 삶을 ‘극한 직업’으로 소개할 때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저 시퍼런 바다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선장으로서의 책임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혹한기 바다 위를 지날 때는 또 얼마나 시리도록 추우셨을까. 화면 속 차가운 바다가 내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 하나를 던져주었다. 아, 이제는 그리운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잦은 두통으로 체육 시간엔 혼자 교실을 지키기도 했다. 학교수업을 내 컨디션에 맞춰서 할 수 있게끔 배려해 주었다. 집에서 큰딸이지만 힘든 일은 모두 둘째 동생에게 주어졌다. 책가방 속에 항상 두통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음마저 나약해져 버린 듯했다. 그래도 차츰 회복되어 건강하게 졸업할 수 있었다.
순간의 무지함이 이렇듯 큰 사건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나의 유년 시절’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건이 되었다. 그날 나 때문에 놀라셨던 아버지와 선생님 생각이 저 보름달만큼 커져만 가는 밤이다.
문득, 그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친 술래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