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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몬드봉봉 Dec 06. 2023

자퇴, 그리고 미네르바 합격


2023, 이상하리만큼 이상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극단의 끝을 달리게 될 줄이야


1월, 고등학교 졸업

3월, 교대 입학

7월, 나홀로 산티아고 순례길

8월, 2학기 개강날 자퇴서 제출

11월, 미네르바 합격


고등학교 졸업, 교대 입학, 산티아고 순례길, 자퇴, 그리고 미네르바 합격까지



순례길, 자퇴


버킷리스트였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기 전까지, '자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은 단언컨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7월, 순례길을 걷겠다고 편의점 알바로 모은 200만원과 대출 받은 200만원으로 나홀로 무작정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매일 아침 갓 구운 바게트를 품에 안고 예술의 도시 곳곳을 누비곤 했다. 하루는 기차를 타고 고흐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마을, 오베르쉬르 우아즈로 파리 근교 여행을 떠났다. 고흐가 사랑한 밀밭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가 한때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 지금 바로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


짧지만 강렬했던 4박 5일 간의 파리 여행을 뒤로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779km 거리의 스페인 북부를 횡단하기 시작한다.

 


그간 얼마나 무딘 채로 삶을 살아왔던 것인지. 지친 줄도 모르고 지쳐가고 있던 것이었을지. 매일같이 25km을 걷고 있자니, 그동안 죽은듯 숨어 있던 내 안의 무언가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세상은 넓고, 나는 참 작구나.'



배움이 좋아서, 자퇴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퇴의 이유는 미네르바가 아니었다.


중학생 때부터 교육과 뇌과학,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교직의 길을 걷겠노라 결심한다. 어쩌다 보니 초등교사이신 엄마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나도 정년까지 초등교사로 근무하게 되겠구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작 열아홉짜리가 겨우 십대에 결정한 학과로 벌써부터 미래를 단정 짓고 있더라.



이 거대한 세상에

한없이 작은 존재로 태어나

나에게 놓인 단 한 번뿐인 삶,

단 한 편의 시


초등교사가 되려면 누구나 지나야 한다는 '교대 4년'이라는 관문부터가 버겁게 느껴졌다. 말로만 듣던 교대의 전반적인 커리큘럼을 파악하고 나니 다소 실망스러웠다. 졸업까지 남은 3년 반이라는 시간이 전혀 기대가 되지 않자 오히려 아깝게 느껴졌다. 3년 반 만큼의 시간 그마저도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들로 채워보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대학의 존재 의미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싶었고, 나만의 목소리를 갖고 싶은듯 했다. 현재 몸담고 있는 이곳은 내 자아실현 욕구를 채우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3년 반 동안 책을 읽고 온/오프라인 강좌를 찾아 들으며 지금 당장 내가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았다. 스스로를 안전지대에 가두기보다는 나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오래전부터 궁금했었던 코딩과 디자인의 세계에 나를 던져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끓기 시작한다.


수강하고픈 6개월 과정의 국비 훈련 프로그램이 있었으나, 대학교 1, 2학년은 국비지원 대상이 아니었다. 전액 국비지원으로 수강하려면 자퇴생의 신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결국 자퇴를 결심한다. 임용을 앞두게 될 교대생은 주저하면 주저할수록 지금만큼의 용기는 내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부모님을 끝내 설득시키고는 귀국하자마자 이틀 뒤인 8월 28일, 1학년 2학기 개강날에 자퇴서를 제출한다.


열아홉,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게 없었다




임상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더랬다. "If you can speak, think, and write, you are absolutely deadly."


교육은 자아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잖아요

누군가를 교육하기 이전에

타인의 자아실현을 돕기 이전에

그보다 교육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잖아요

대학은 그래야만 하는 곳이잖아요


부모님께 자퇴를 선언하고서는 미네르바가 아니면 대학에 뜻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 누가 알았을까

내 두 발로 걸어낸 779km의 순례길이

실은 삶을 향한 투쟁이었음을



배움이 좋아서, 미네르바



3년 전 오늘 즈음, 엄마와 나는 유튜브에서 미네르바 대학의 창립자이자 미국의 스타트업 CEO인 벤 넬슨(Ben Nelson)의 강연을 보고 있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미네르바는 4년 간 5개의 나라를 옮겨 다니며 자체 온라인 플랫폼에서 교육을 진행하는 혁신 대학이다. 주요 특징으로는 캠퍼스가 없다는 것과 전통적인 강의식 교수법을 따르지 않고 토의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각 도시에서 Civic Project를 통해 배운 지식을 실제로 적용해보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내가 꿈꿔왔던 가장 이상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자퇴 후 9월 중순부터 국비학원을 다니며 미네르바 서류, 시험 등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편의점 알바와 과외를 병행하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었다.






2023年 11月,

언제나처럼 오늘도

어제만큼이나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이

컴퓨터 학원을 향하고 있었고,

졸음이 쏟아지던 출근길 지하철 안이었고,

심장이 터질듯한 긴장감 속 메일함을 확인하고는


“엄마, 저 미네르바 합격했어요.”



 

나의 2023年,


마치 태초부터 누군가 예비해두신 것처럼요

누군가 한땀 한땀 수놓은 이야기 마냥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한 편의 시처럼요


비용이 문제된다 한들

당신이 친히 수놓으신 그 길

나의 달려갈 길이라면

친히 채워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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