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아빠에게도 아빠가 필요했고,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고,
당신에게는 당신이 필요했고,
나에게는 내가 필요했다고.
/
이 삐뚤어진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했다.
나에게 직시라 함은, '받아들임'의 과정이다.
나는 가족을 사랑한 나머지
가족과 같이 살기 싫었다.
그들의 힘든 모습을
곁에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것을 바라보고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그 상황이
원망스러웠고, 끝내 좌절했다.
그래서 가족을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은 척했다.
선한 마음을 묻어두고
악한 마음을 꺼내다
—내 심장에 붙였다.
내가 집을 떠난 이유는
당신들 때문이라고 하고 싶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찾아온 이곳에서
우리가 힘든 이유는 결국 당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잘못이며 우리의 몫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루를 지내고
또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 연고도 없이 찾아온 이곳에서
힘든 가족의 등을 토닥이고 쓰다듬지 않고
원망만 했다.
사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결국 우리 때문인데.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빠에게도 아빠는 필요했고,
엄마에게도 엄마는 필요했고,
당신에게도 당신은 필요했으며
나에게는 내가 필요했더라고.
/
추억에 젖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 사이에
조용히 앉아있던 아빠가
하모니카를 찾아 부르던 모습이 생각났다.
...
/
훗날 정말 지구가 멸망하게 된다면
나는 그때도 우리는 서로가 필요했고,
우리는 우리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마지막으로 숨을 못 쉴 정도로
아주 세게 안아보자고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상상을 하던 끝에 나는
무기력증에 잔뜩 절여져서
진정이 안될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눈물에 젖어있었다.
만약에 세상이 끝나간다면
난 당신 곁에 있고 싶다.
그때가 되면 당신도 내 곁에 있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마음에 든 병에 무너진 나에게
그중에서도, 최선을 다한 당신들에게
내 전염병이 옮겨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
마치 매일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다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무거운 짐 한 보따리 등에 지고
일을 하는 당신들에게
혹시 짐덩어리가 되지는 않았을까.
아주 쉬운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내가
당신들에게 짐덩어리가 되지는 않았을까.
밥 한 끼를 챙겨 먹을 때에도
돈걱정하는 당신들에게
그 걱정 섞인 식사를 하는 내가
식량을 없애버리는 식충같이 느껴져서,
결국 또,
당신들에게 짐덩어리나 되지는 않았을까.
당신들이 내게 하는 걱정 중 하나가 혹시
나에게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초조하고 불안하지는 않았을까.
결국 나를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또다시 병원에 나를 보내지는 않을까.
여기저기에 흙탕물 튀기지 말라던
그녀가 생각났다.
피해 끼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한 그녀는
이미 내가 짐덩어리라 말하는 듯했다.
혹여나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봐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여전히 내가 짐이 되는지에 대해
나는 내 마음에 든 병을
약으로 고치고,
그녀는 그녀의 마음에 든 병을
인간관계를 통해 고치고,
아빠는, 그리고 엄마는 일로 고친다는 게
너무 말도 안 되는 모순같이 느껴졌다.
나는 끝내 약으로 내 병을 고치지 못했고,
그녀는 인간관계로 이겨내지 못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쁜 일상으로
상처를 묻어둔다는 사실에
모순을 느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은 자신만 읽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하고,
요즘 세상에는 행운을 돈 주고 산다는 게,
어떤 노력을 해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뱉었다.
행복하지 않은데 일기장에 행복하다 적을까 봐.
돈을 주고 코팅돼 있는 네잎클로버를 사서
말도 안 되는 행운을 기념할까 봐.
그래서 울었다.
내가 나 아프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두 생명이 하늘에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 나는 끝내 이기적인 인간이 아닐까
一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
단지 한 번에 모든 것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런 순간이 다가온다면 꼭 고백하고 싶다.
전부 나 때문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모두 좋은 곳으로 갈 거라고.
다만, 나만 빼고서.
미안하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을 좋아하는 내가
내 삶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말은
"고마워."
그 한 마디뿐이다.
우리는 우리 서로가 필요했다.
다만, 나만 빼고서.
그렇게, 나만 빼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