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약 한 알을 삼킨다. ‘웰부트린 엑스엘정’. 무기력함을 조금 덜어주는 약이다. 사실 좋아지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매일 빠짐없이 먹는다. 임의로 단약했을 때 어떤 후폭풍이 오는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약을 삼키고 나면 잠시 멍을 때린다.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집안일이라는 건 해도 티가 잘 안 나는데, 안 하면 바로 티가 난다. 나는 남들보다 집안일을 더 힘들어하는 편이다. 퇴근하고 나면 남은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저녁 먹고 누워 있으면 어느새 잘 시간이 되어버린다. 회사가 가까운 게 그나마 다행이지, 대부분의 집안일은 주말에 몰아서 처리하는 게 일상이 됐다.
간단히 세면을 하고 사원증, 지갑, 애플워치, 스마트폰, 그리고 아침식사로 단백질 쉐이크를 챙겨 회사로 향한다. 집에서 회사까지 도어 투 도어로 20분. 나는 지금 어떤 연구소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이고, 어느덧 2주차에 접어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독립도 하게 되었고, 졸업요건도 충족해 자연스럽게 졸업까지 마쳤다. 출근 시간은 9시까지인데 보통 8시 55분에서 59분 사이에 도착한다. 아슬아슬하다. 5분만 더 일찍 나오면 될 것 같은데, 그 5분이 말처럼 쉽지 않다.
업무는 단순하다. 선배 연구원들의 실험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보조하는 일. 하루 업무량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 대부분의 시간은 비교적 자유롭게 보낸다. 요즘은 브런치 글 읽는 데 빠져 있다. 공부할 걸 가져와볼까 싶지만, 또 막상 공부는 하기 싫다. 기사 시험은 이미 끝났고 어학도 끝났고, 인적성을 하기엔 공채도 안 떴다. 핑계라기엔 진짜 공부할 게 없다. 어쨌든 티 안 나게 딴짓하는 스킬만 늘어가는 요즘이다.
퇴근은 저녁 6시. 인턴은 연장근무 수당도 없다 보니 굳이 남아 있어봤자 의미도 없고, 내가 오래 있는다고 해서 더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집에 도착하면 6시 20분. 아침에 보고 나온 그 한숨 나오는 집안 꼴이 또 눈에 들어와 기분을 살짝 망친다. 하지만 오늘도 집안일을 할 생각은 없다. 나는 지금 쉬고 싶으니까. 회사에서 별일을 하지 않아도 9시간 동안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 아마 적응이 안 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는 남들보다 에너지가 적은 사람인 것 같다. 조울증의 영향도 있겠지.
집에 오면 가장 먼저 식사부터 한다. 정신과에서는 규칙적인 루틴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며 식사를 거르지 말라고 했기에, 웬만하면 챙겨 먹는다. 주 메뉴는 낫또나 냉동 닭가슴살에 현미밥. 그 전에 야채를 먹어 혈당을 방어하라는 말도 있어서, 잘 모르긴 해도 일단 먹는다. 하지만 이렇게 차려 먹는 것도 귀찮고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너무 싫다. 앞으로는 회사 구내식당에서 먹고 오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식사가 끝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본다. 그러다 9시 반이 되면 샤워하고, 잠들기 전 약을 먹는다. 리튬, 아리피프라졸, 데스벤라팍신. 이렇게 세 가지를 먹는다. 메인은 리튬과 데스벤라팍신, 아리피프라졸은 보조로 들어간다. 이 조합으로 먹은 지 1년 정도 된 것 같다. 정신과를 다닌 4년 동안 약을 정말 많이 바꿨는데, 리튬만큼은 3년째 꾸준히 먹는 중이다. 맞다, 그 배터리에 들어가는 리튬이다. 나도 처음에 알고 신기했다. 약물 기전을 검색해보니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약을 먹고 누우면 하루가 끝난다. 바로 잠들면 좋겠지만, 입면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눈을 감고 1시간쯤 아무 생각 없이 있다 보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아침이 된다. 예전에는 잠들기 직전에 안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올랐는데, 약효가 잘 드는 건지 병이 나아지고 있는 건지 요즘은 그런 생각이 거의 없다. 다만, 잠들기 전의 그 몽글한 순간에 글 아이디어를 종종 얻곤 해서 조금 아쉽기도 하다. 물론 정신 건강에는 훨씬 낫다.
이렇게 나의 하루가 마무리된다. 사실 별 게 없어 민망할 지경이다. 그래도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하나다. 정신질환이 있다고 해서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예민하고, 조금 우울하고, 아침 저녁으로 약을 챙겨 먹는 게 귀찮을 뿐이다. 혹시 이 글을 읽은 사람 중에 ‘나 정도는 힘든 게 아니겠지’ 하고 병원에 가는 걸 망설이는 이가 있다면,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월요일과 금요일에 연재된다. 꾸준함에 약한 나에게 스스로 내린 작은 숙제이자, 독자들과 하는 약속이기도 하다. 일단 올해 동안 계속 써보는 것이 목표다. 이 첫 글을 읽는 분들께,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하자고 조심스레 제안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