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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Dec 29. 2023

창문 앞의 기다림

그리움 - 차이코프스키 "오직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거의 모든 직업이 그랬던 것처럼 화가의 대부분의 남자였던 만큼 우리가 보고 있는 과거의 대부분 작품은 남성의 시각에서 그려졌다. 

그들이 보는 세상에서 여체는 시대나 작가의 취향에 따라 토실토실하거나 낭창한 몸매로 형태가 변하긴 했지만 공통적으로 이상화되어 아름답게 그려졌다. 

주름따윈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미소, 잡티 하나 없는 우유빛 피부, 풍성한 머리카락, 청춘의 상징과도 같은 발그레한 홍조와 장미빛 입술.

현실과는 살짝 동떨어졌지만 그리는 이와 보는 이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니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악(惡)은 아니지 않은가?

 

화가의 캔버스 앞에 선 여인들은 화가의 시선을 느끼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화가들이 있었을까?

하나의 연출된 상황에서 여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덴마크 화가 칼 빌헬름 횔스의 작품은 특별하다 

여타 남성 화각들의 시각과는 달리 그의 그림 속 여인들은 다소 중립적인 관점에서 그려졌다. 

평범한 일상에서 그려진 그의 여인들은 뒷모습이거나 옆모습으로 그려졌다.

몽롱한 눈빛으로 관객을 응시하거나, 관객들이 부담없이 감상할 수 있도록 시선을 그림 밖 어딘론가 돌린 채로 아름다운 육체를 뽐내지도 않는다. 


하얀 목을 드러낸 여인들의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관찰하는 듯한 화가의 시선은 관음적일 수도 있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우리의 누이이거나 어머니 또는 이웃 여자처럼 너무나 평범하다.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얼굴을 숨기고 등장하는 그들은 신비롭기는 하지만 섹슈얼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여타 다른 여자 모델들의 그림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의 그림을 볼 때 불편함이없다.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는 일상에서 만난 그들에게 안부를 물으면 그들은 "응, 잘 지내고 있어, 어젯밤은 좀 쌀쌀해는데 감기 걸리지 않았어?" 라던가 "우유가 필요해서 옆집 꼬마에게 심부름을 시켰어, 곧 가지고 올거야" 라는 평범한 대답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들의 대답처럼 드라마틱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 심장이 전혀 두근거리지 않는 지루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런 익숙함이 고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안겨준다. 

그리고 점점 그림 속의 여인들에게 말을 걸며 나도 모르게 그 안으로 빠져든다. 


그런 할스의 그림 중 창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인을 그린 그림이 있다. 

정적으로 그려진 말없는 그림이지만 그림 속의 그녀를 보고 있자면 이심전심이랄까?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축처진 어깨와 물끄러미 창밖만을 응시하는 그녀의 가슴 속에는 어떤 간절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반대편에 있는 앤틱 가구와 작은 소품, 그리고 그림이 떼여진 하얀 벽은 단순한 공허한 공간을 보여줄뿐 아니라 창 밖만 바라보고 여인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반대쪽 창가에서 화사한 햇볕이 쏟아지는 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의 의상과 비슷한 소재처럼 보이는 축처진 하얀 커튼은 창문을 반쯤 가리고 있다. 

반쯤 가려진 커튼 사이로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간절히 누구를 기다리는 중일까?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흘러흘러 지나가는 일상과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 간절함이 담겨 있는 그림을 보며 작가의 연출력에 감탄할 뿐이다. 


"대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거야? 창문 밖에 무언가 있어?"

라고 그녀에게 묻는 다면 반쯤 가려진 커튼처럼 그녀의 대답이 솔직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나 역시 그녀의 대답에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을 것 같다. 

"오, 그래? 그렇구나."

라고 대답만 하고 '그저 고민이 있는가 보군' 하며 무심히 방을 빠져나올 것 같다고나 할까.  


조용한 방 안의 창문 앞에 앉은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멀리서 오고 있는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심코 흐르는 계절의 변화를 속절없이 느끼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걸까?

기다리는 건 어쩌면 사랑하는 연인의 소식일까?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이렇게나 끌리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과거의 나의 모습이 그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카카오톡이니 다양한 매체가 있어 화상통화도 가능하고, 외국에 전화거는 편이 한결 쉬었지만, 

내가 유학하던 당시만해도 한국에 전화를 건다는 건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거기다 기껏 전화를 해도 시차 때문에 길게 통화한다는 건 힘들었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고민이 있어도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는다는 건 말이 안 통하는 외국에서 쉽지 않았다. 

그리움은 점점 쌓여가고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이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오직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오직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나의 이 고통을 알리라!


모든 즐거움에서 홀로 떨어져 


허공을 바라본다.


아, 날 사랑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멀리 있구나. 


이 내 눈은 어지럽고 내 가슴은 타오른다.


오직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나의 고통을 알리라.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 중에 나오는 시는 여러 음악가의 공감을 얻었나 보다. 

슈베르트와 차이코프스키가 이 시에 아름다운 곡을 붙였는데, 내가 이 시를 접한 것은 재밌게도 가사가 없는 바이올린 곡이었다. 

조슈아 벨이 연주한 곡을 듣는 순간 어찌나 내 마음과 딱 떨어지는지...


어떻게 가사가 없이도 음악만으로 원작 시의 느낌 그대로를 살릴 수 있을까?

한창동안 듣다가 이 곡이 사실은 가곡을 편곡한 것이라는 걸 알고 가사를 찾아보았다. 

차이코프스키도, 괴테도 그리움이란 걸 사무치게 느껴본 사람들이었을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시대와 문화가 달라도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모두에게 그렇게나 속이 타오르고, 애달프며, 고통스럽게 다가오나 보다. 


그림 속의 여인의 속사정을 알지 못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내가 알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동병상련의 감정일까? 아니면 간절한 그리움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우리의 본능 어딘가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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