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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Dec 07. 2023

가난한 시인

바쁜 것인가? 귀찮은 것인가? - 바흐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최근에 글을 올리는 일이 뜸했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일이 많았다. 마무리하는 일도, 새롭게 시작하는 일도, 그리고 처음 겪는 일도 있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고 동시에 고마운 사람도 많다는 진리를 새삼 다시 느꼈다. 부디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아무튼 이렇게 2주 동안 다사다난한 일상을 하루하루 보내다 보니, 이를 핑계로 브런치에 올리는 것도 지연되었다. 하루 10분 짬이라도 내어서 글을 쓰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노트북을 켜고 아무리 손가락을 토닥거리고 있어도 마음이 심란하니 도저히 글을 쓸 기분이 나지 않았다.


이런 글, 저런 글 써보다가 지우고, 노트북을 다시 닫고 다른 보다 단순한 일에 몰두했다. 마음이 답답하니 그냥 이유 없이 집 앞을 걷고, 기름값이 아깝긴 하지만 목적 없는 드라이빙을 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해졌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이 마음의 답답함을 시간이 해결해 줄지, 아니면 다른 외부의 무언가가 또는 나 스스로 해결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런 답답함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래도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은 내 마음 구석 어딘가의 "해야 할 일 리스트"에 5순위에는 꼭 들어가 있었다. 사실 아주 놀랍게도 어떤 작품들에 대해 쓸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렇게 마음이 심란해지고, 사건이 터지고, 거기에 비해 나는 미적미적거릴 때부터 내 머릿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조그만 방에는 어떤 그림이 이미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떠한 음악에 대한 갈구, 정확히는 향수가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에 대해 쓴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심란한 나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조금 마음을 진정시켰다. 집에 있기보다는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나와 추운 날씨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사이즈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열심히 사는 세상 사람들을 구경하며 마음을 다시 한번 다 잡는다. 그리고 내내 마음 한 켠에 걸려있던 그림을 꺼내본다.


평화로운 전원의 풍경도 아니고, 아름다운 꽃그림도 아니다. 나의 마음이 한참 동안 심란했을 때 계속 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그 그림은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칼 슈피츠벡의 "다락방에 누워있는 늙은 시인(가난한 시인)"이다.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해학과 삶의 고단함이 동시에 묻어 나오기 때문일까? 그다지 크지 않은 그림임에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중산층이 한창 증가함에 따라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독일 비더마이어 시대에 활동했던 칼 슈피츠벡은 참으로 날카로운 시선으로 일상의 독특한 소재들을 찾아내어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상케 하는 소박하고 간결한 화풍으로 그것들을 담아내었다. 그의 그림을 보고 나도 모르게 끌린 이유를 짐작해 보자면 우리 조선시대의 화가 김홍도가 연상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을 계속해서 보다 보면 실제 일상을 한 장의 사진처럼 포착하여 그대로 옮긴 듯하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상상 속 이야기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미형의 인물들이 아닌 수더분한 외모의 친근한 등장인물들이 평범한 일상의 장소 어딘가에서 영위하는 자연스러운 삶의 한 장면은 단순한 순간이 아닌 전후의 긴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나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어디선가 보거나 들은 이야기 같기도 한 이 장면들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기도 하고, 때때로 교훈을 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내가 심란한 일상 한가운데에서 헤매고 있을 때에 슈피츠벡이 그린 늙은 시인의 모습이 떠오르며 내 스스로가 오버랩된 것은 한없이 어딘가로 숨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이 반영된 동시에 나의 게으름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반성이 작용된 이중적인 이유 때문 일 것이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낮고 좁고 허름한 방안에 매트리스만 겨우 깔고 누워있는 늙은 시인을 보고 있자면 처음에는 측은함이 느껴진다. 새는 비 때문인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 때문인지 천장에 달아놓은 우산은 그의 곤궁한 삶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래도 나름 깔끔한 성격인지 좁은 방안은 가지런히 정돈이 되어있다. 사회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외투와 모자는 바지런히 벽에 걸려있고, 가재도구, 책과 원고들도 좁은 방안에 널브러져 있지 않고 차곡차곡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얀 지붕이나 시인의 옷차림을 보면 추운 계절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왼편의 난로를 보고 있자면 시인이 밤새 추위를 이기기 위하여 자신의 원고를 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타까움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영혼을 담은 원고를 추위를 이기기 위해 불쏘시개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지난밤은 얼마나 잔인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시 창작열을 불태운다. 벽에는 그에게 썼을법한 낙서들을 찾아볼 수 있다. 번뜻이는 영감을 잊지 않고자 쓴 것일까? 아니면 일상에 힘을 주는 문구일까? 좁고 허름한 그의 방은 타인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온전한 그와 그리고 시예술의 세상이다. 사뭇 경외로운 공간이지만 한켠으론 찜찜하기도 하다.


내가 물질만능주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좁은 방 안에 틀어박혀 시나 짓는 시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부인은 삯바느질에 밤새 눈을 비벼가며 생계를 책임지는데 과거를 핑계로 글이나 읊으며 살아가는 조선시대 한량선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행인지 불행인지 시인에게는 대신 삯바느질을 해주는 부인은 없지만 말이다. 현실과는 거리를 둔 체 팔리지 않는 시나 짓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움과 함께 화마저 난다. 물론 그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림 속의 인물이 마티아스 에텐휴버라는 실존시인을 모티브로 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지만, 이상을 좇으며 현실을 외면하는 이가 어찌 그 시인 혼자뿐이었겠는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예술작품 속에서도,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디 흔한 이들이 그리 살았고, 어쩌면 나 자신도 그들 중 하나일 수 있다.


이러한 무의식 속의 이런 연상작용 때문인지, 그동안 나의 마음이 점점 피로해져 갈수록 시인의 다락방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락방 속에 웅크려 있기 싫었지만, 이상하게 동시에 다락방을 더욱더 갈구하는 이상현상이 벌어졌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영혼의 휴식이 더욱 필요했다.


차 안에 앉아 눈을 감으며 귀에서 나지막한 플루트의 선율이 들리기 시작한다. 뒤이어 현악 선율이 뒤따라 들린다. 미치거나 환청이 아니다. 그저 마음의 향수가 발동한 것이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칸타타 "나의 즐거움은 힘이 나는 사냥뿐" 중 9번째 곡 "양들은 평화로운 풀을 뜯고"의 멜로디가 은은하게 귓속, 아니 정확히 머릿속에서 울리면서 숨을 깊이 내쉰다.


제목 그대로 평온하고 목가적인 선율을 따라가면 양들이 메에에~거리면서 드넓은 푸릇푸릇한 초원의 풀을 오물오물 뜯어먹으며 떼 지어 있는 풍경이 그려진다. 푸른 하늘, 하얀 뭉게구름, 따스한 햇살에 가끔 부는 미풍을 맞고 있으면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한가롭게 풀을 뜯으며 물아일체가 되는 순간이다... 엄마의 품처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 영원히 머물고 싶은 그곳... 누구에게나 그런 공간이 현실이나 상상에서 존재하지 않을까?


시인에게는 누추한 어느 지붕 밑의 좁은 다락방이 바로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다. 그림이 아닌 현실을 사는 나는 언제까지 좁은 다락방 매트리스에 누워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바흐의 아름답운 음악이 주는 마음의 평화는 잠시 즐기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아름답고 평온한 일상이 좋은 것임을 알지만 그것을 유지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려면 초원을 떠나야 하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양으로 태어났다면 목동과 자연의 보살핌을 받으며 한가롭게 풀이나 뜯는 삶이 가능하겠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자체로 책임이 뒤따른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조촐한 삶도 훌룡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럴만한 그릇도 아니고, 환경도 그렇지 않다. 예술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은 잠시 다시 삶의 파도 한가운데로 열심히 헤엄쳐 나가야 할 때이다. 두려움과 게으름은 잠시 넣어두고 평범한 나만의 삶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꾸준히 지속하다 보면 현재 나의 어려움과 번민은 사라지지 않을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고 다락방이 아닌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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