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만 년 전 인류가 문득 떠오른다. 다름 아닌 오스트랄로피테쿠스(걷는 사람)이 그것이다. 지구 생성과 함께 출현한 인류다. 이 시기엔 인간이 두 발로 걸었지만 매우 불완전한 모습이었다. 새삼 인류 역사를 더듬어본다면 1백 50만 년 전 쯤엔 ‘서서 걷는 사람 (直立 人間,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났잖은가. 이들은 도구 및 불을 이용하는 지혜를 갖추기도 했다. 이 때 인간이 직립하면서 땅 위를 두 발로 걷자 고안해 낸 물건이 신발이다. 이것은 그들 삶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법 하다. 들판 및 산 속을 맘껏 뛰어다니며 수렵 행위를 할 때 발을 보호하는 물건으로썬 신발이 제격이었다. 훗날 이것은 사회적 계급과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로도 작용했다. 요즘엔 패션 아이템으로까지 부상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황제들은 유리 제품으로 만든 신을 신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공작, 귀족들은 두꺼운 재질로 제작한 높은 힐을 신기도 했다. 평민과 차별을 두기 위해서이다. 또한 부와 명예를 과시하는 한 방편으로써 신발을 이용했다. 이렇듯 한낱 신발을 통하여 그것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와 역사적인 가치를 새삼 재조명해보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백제시대 분구묘墳丘墓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 사진을 묵은 신문에서 우연히 보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단박에 매료 됐다. 한편 감회가 매우 새로웠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잠시나마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랄까. 기원전 18년 하남 위례성 일대에 건국된 백제다. 신발 한 켤레가 그 시절 사람들 혼과 얼을 담뿍 안고 현세現世에 찾아온 듯하여 다시금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것을 통하여 백제인들 삶과 당시 문화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부쩍 호기심이 발동했다.
무엇보다 이는 여태 고분古墳에서 발굴된 것 중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서이기도 하다. 비록 사진이지만 마치 실물을 눈앞에 대하는 듯 생생하잖은가. 신발 질감과 색감이 매우 입체적으로 돋보여 시각까지 한껏 자극한다.
사진 속 금동 신발은 길이 32cm로 바닥과 측면 등 전체를 맞새김(투조透彫) 기법으로 만든 게 특징이다. 바닥엔 스파이크 모양의 징 18개가 붙어있다. 특이한 것은 징 부착지점을 꽃무늬로 장식한 점이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미감美感을 발흥發興 시키기에 충분한 기법이다. 바닥 중앙에는 용 한 마리가 마치 하늘로 승천이라도 하듯 꿈틀거리는 형상으로 조각 됐다.
당시 민초들은 짚신 아니면 가죽신 및 나막신 등을 신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금동신발은 재질부터가 고급스럽고 장식품들이 화려하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온 면모가 오롯이 이것에 서린 듯 했다. 뒤꿈치엔 역사상力士像이 투조透彫로 조각 되어있다. 신발 여백 공간엔 봉황, 길상조吉祥鳥 등이 선명히 새겨져 있잖은가. 이것을 면밀히 살피노라니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진다. 당시 흥망성쇠로 얼룩진 영욕榮辱의 길을 누군가가 이 신발을 신고 걸었을 거라는 상상 때문이었다. 사실 그 시대 민초들은 귀한 금동 신발은 언감생심 꿈조차 못 꿨을 듯하다. 모르긴 몰라도 필경 이 신발 주인공은 평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유추를 해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신발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상상으로 백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노라니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과 희구希求는 별다를 게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다 아다 시피 백제 의자왕 역시 삼천궁녀를 거느린 채 밤낮 향락에 빠졌잖은가.
사진 속 금동신발의 주인공을 곰곰이 추론해본다. 상상 속 주인공은 다섯 발가락용이 그려진 오조룡보(五爪龍補) 곤룡포를 입었던 백제왕이었을까? 아님 낙화암에 몸을 날린 삼천 궁녀 중 한 명이었을까? 상상의 날개를 한없이 펼치노라니 갑자기 금동 신발 주인공이 눈앞을 스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아마도 이 신발 주인공은 평소 자신이 지닌 권능權能을 내세웠던 귄세가 같다. 권력은 그 위력이 상당하다. 권력 주위엔 그 후광을 입으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덕분에 권력자는 절로 부와 명예도 얻는다.
인간이 이러한 욕망을 추구할 때 행동 주체는 발이 담당하기도 한다. 어둠과 광명을 선택하는 걸음 역시 발 몫이 아니던가. 이에 신발 유형에 따라 인간 행동 양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 신발은 인간 호흡을 조절하는 기능도 지녔다. 편치 않은 신발을 신고 급히 높은 곳을 오르면 숨도 차고 자칫 미끄러질 수도 있다. 반면 편안한 신발을 신고 유유자적 걸을라치면 호흡마저 안정을 되찾는다. 어쩌면 우리네 호흡을 조율하는 게 발과 신발일지도 모른다. 아울러 인생성패도 가름한다면 지나칠까. 지난날 필자 또한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힘겹게 끌며 숨차게 인생길을 걸어온 듯하다. 뒤돌아보니 이슬에 불과한 헛된 욕심덩어리를 잔뜩 양 어깨에 둘러멘 채 바삐 걸어왔다.
어찌 이 뿐이랴. 사랑, 부, 명예도 그 길 끝은 결국 이슬이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흔적 없이 스러지는 게 이슬 아니던가. 그래 인생사엔 그 무엇도 영원불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