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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왕 메리가 너무 억울하다고?

by 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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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왕조의 3대 왕이자 영국 역사상 첫 여왕이었던 ‘메리’의 이름에 붙어 다니는 ‘블러디’는 왕의 별칭 가운데 최악이다. 얼마나 피를 많이 보았으면? 1553년 즉위할 때 메리 여왕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주름이 깊이 파인 볼, 날카롭고 냉혹한 시선, 얇은 입술… 호러 영화 등장인물처럼 음산하다. 이런 초상화를 그대로 남기다니 너무 무신경했던 것이 아닌가? 약간의 ‘포샵’ 정도는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블러디 퀸 메리(Bloody Queen Mary)’, 원래 이름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공식화했다. 그것도 『어린이를 위한 영국 역사』에서.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마리 튜더』라는 짧은 희곡에서 메리 여왕을 모델로 질투가 심하고 까다롭고 잔인한 살인자를 등장시켰다. 미국 소설가 헤밍웨이는 톡 쏘는 칵테일을 만들어 여왕의 이름을 붙였다. 토마토와 보드카를 섞은 붉은색 칵테일이다. 점입가경이다. ‘블러디 메리’는 술집에서 불리는 이름이 되었다. 너무 가혹했다. 메리보다 더 잔인한 왕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선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부터 그렇지 않은가?


메리 여왕의 어머니는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넷째 딸 카타리나, 영어로 캐서린이었다. 열여섯 살에 영국 왕세자와 결혼해 영국으로 왔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부부가 병이 들었는데, 신랑은 죽고 캐서린만 살았다. 시아버지 헨리 7세는 며느리가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둘째 아들을 형수와 약혼시켰다.

교황청에서는 망설였지만 허가했다. 첫날밤을 치르지 않았으므로 재혼해도 된다고 선언했다. 7년이 흘러 헨리 8세가 즉위했다. 형수였던 다섯 살 많은 캐서린과 시동생이었던 헨리 8세는 사이가 좋았다. 후계자 생산의 문제만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맨 먼저 출산한 왕자가 몇 주를 못 넘기고 죽었다. 그리고 매년 한 차례씩 유산했다. 9년 만에 드디어 출산에 성공했다. 공주 메리였다. 그리고 더 이상 출산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공주 메리는 조숙하고 영리했다. 헨리 8세는 딸을 후계자로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었다. 그래도 아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수와 결혼한 것이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 아닐까? 그는 자문했다. “형수나 제수를 데리고 살면 (....) 자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 성경 레위기 20장 21절에 말씀이 있지 않은가? 캐서린이 스스로 물러나주면 새 왕비를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캐서린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헨리 8세가 교황청에 혼인을 무효로 만들어 달라고 빌자 재판이 열렸다. 교황청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맹세하는 캐서린의 편을 들었다. 재판은 6년을 끌었다. 헨리 8세는 교황청과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기독교 교파 ‘성공회’가 갈라져 나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왕은 35세, 왕비는 41세였다. 캐서린은 궁에서 쫓겨났고 메리는 사생아가 되었다. 메리의 나이가 17세였다. 거느리고 있던 시종이 130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메리는 가톨릭 포기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가혹한 왕명이 내려졌다. 어머니와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 어머니가 아플 때 가보지 못하게 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메리는 식욕을 잃었다. 월경통이 심했다. 몸이 아팠다. 메리는 그렇게 17년을 살았다.


드디어 헨리 8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에드워드 6세였다. 그러나 ‘왕국의 가장 중요한 보물’은 오래 살지 못했다. 죽을 것을 알게 된 에드워드 6세는 왕위를 넘겨받게 될 큰 누이 메리가 영국을 다시 가톨릭으로 만들 것을 걱정했다. 메리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16세의 친척 누이 제인 그린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40세가 다 된 누나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 에드워드 6세는 죽을 때가 된 것 같으니 와달라고 메리를 불렀다. 메리는 가지 않았다. 제인 그린의 세력이 파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 가톨릭 지역으로 피신했다. 왕위 계승에 대한 왕의 유언은 반역이며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성공했다.


메리는 말을 타고 8백 명이 넘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런던에 입성했다.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외할머니 스페인 이사벨 여왕처럼 스스로 여왕이 되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마른 체격이었지만 나직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상대를 제압했다. 고도 근시 때문에 쏘아보는 푸른 눈은 상대가 감히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다. 런던탑에 갇힌 제인 그린은 창문 너머로 남편이 참수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참수되었다.


메리는 하나하나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갇혀 있던 가톨릭 주교와 지도자들을 석방했다. 교황청과 소통을 다시 시작했다. 무효화된 부모의 결혼을 다시 합법으로 만들었다. 귀족들에게 셋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가톨릭으로 돌아간다, 나라를 떠난다, 파문을 받고 처형된다. 800명 정도가 영국을 떠났고, 300명 정도가 불로 죽음을 당했다. 성공회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관련자들은 사형당했다. 이복 자매 엘리자베스 공주는 가톨릭이 되겠다고 맹세하고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이복 언니 메리가 죽을 때까지 갇혀 있었다. ‘블러디 메리’, ‘피의 메리’는 이때를 암시한다.


즉위한 37세의 여왕 메리는 혼처를 찾기 시작했다. 다급했다. 왕자를 낳아야 이복동생 엘리자베스가 왕이 되는 것을 막고, 그래서 영국이 다시 신교도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독실한 가톨릭인 사촌 카를 5세에게 편지를 썼다. 사촌은 아들인 스페인의 왕 필리페 2세를 소개했다. 아내와 사별한 홀아비였던 필리페는 메리보다 11세 연하의 오촌 조카였다.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왕자의 전신 초상화가 영국에 도착했다. 미남은 아니었지만 여왕은 마음에 들어 했다. 결혼이 합의되었다. 필리페는 8개월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필리페를 직접 만난 여왕은 첫눈에 반했다. 필리페는 어땠을까? 불행한 세월의 흔적이 깊이 배어 있는 여왕의 얼굴은 너무 나이가 들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페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겠다고 알렸다. 그를 못 가게 잡아야 한다. 메리가 임신을 알렸다. 필리페는 내심 임신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 만일 메리가 죽으면 동생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했다. 출산이 가까워지자 메리는 거처를 옮겨 준비했다. 시간이 흘렀다. 날짜가 지나갔지만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예정일이 몇 달 지나 여왕의 배가 줄어들었다. 가상 임신이었다.


필리페는 떠났다. 사랑에 빠진 메리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필리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이 아팠다. 난소 종양이었다. 필리페로부터 소식이 왔지만 오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신교도들과 전쟁을 해야 하니 지원 병력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메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군대를 지원했다. 필리페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영국 영토였던 칼레 지방이 프랑스로 넘어갔다. 대륙에 마지막 남아 있던 영토를 잃은 영국 국민은 분노했다. 메리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 때문에 국민을 배반하고 미움을 받게 되었다. 신은 나를 버리셨다. 절망했다. 여동생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사망했다. 42세였다. 재위기간은 겨우 5년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메리의 재위기간이 좀 더 길었다면 영국이 다시 가톨릭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당시 일반 국민도 대부분 가톨릭이었으니 일리가 있는 가설이다. 그러나 메리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는 평생 독신이었다. 메리에게 닥친 불행을 보고 결혼하고 싶었겠는가? 2대에 걸친 종교 분쟁을 지켜본 영국 국민은 이후 ‘관용법’을 제정해 종교의 자유를 입법화했다.


수많은 희생을 낸 영국의 종교 분쟁 동기는 국민들과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왕이 아들에 집착했고, 공주는 잃었던 지위를 되찾고 싶어 했고, 여왕이 된 공주는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군대를 지원하고 영토를 잃었다. 행동의 동기는 사적인 욕망들이었다. 민주주의는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왕과 여왕과 같은 몇 명의 특별한 개인들의 욕망에 좌우되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지 않은가?


그러나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위험에 처한다. 사적 욕망을 공적 욕망으로 착각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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