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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오아시스에 사는 까닭은?: 알제리 가르다야(1)

by 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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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가르다야에 가시겠소? 알제리에 갈 때마다 키아티 교수가 물었다. 다음에 가겠습니다. 번번이 그렇게 대답했다. 잘 몰랐고 관심이 없었다. 무지와 무관심은 같은 말이다. 천 년의 역사를 뒤로 한 사하라의 오아시스 도시를 직접 가보고 나서야 왜 그렇게 가르다야를 보여 주고 싶어 했는지 알았다.

네 번째 갔을 때 공항에 마중 나온 키아티 교수는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국내선 비행기를 갈아타게 했다. 소형 밤 비행기가 몹시 흔들렸다. 다행히도 비행시간은 길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공항에 내려 어디론가 차를 타고 갔다. 헤드 라이트 빛에 보이는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늘어선 길의 끝, 제일 위쪽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천장이 높았다.


안내받은 이층 방에서 자고 아침에 깨어나 보니 창밖 저 멀리 붉은 땅이 펼쳐져 있었다. 알제에서 남쪽으로 600킬로 떨어진 사하라 북부 므자브 계곡의 중심 도시 가르다야였다. 창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지 않았다. 그저 벽이 삐뚤게 네모로 뚫어져 있을 뿐이었다. 빗물이 들이칠까, 찬바람이 들어올까 걱정하지 않는 곳에서는 유리가 필요 없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막상 보니 신기했다. 1층에 내려가니 모자이크 유리 천장을 통해 빛이 내려오는 식탁에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내 평생 최고의 맛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커피우유였다. 잠을 깨우고 세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진한 커피와 버터와 치즈를 아직 빼앗기지 않은 진한 우유가 적당한 온도와 농도로 섞여 있는 그 맛, 그때까지 최고라고 생각해던 파리 셀렉트 카페의 것을 능가하는 황홀한 맛이었다. 커피우유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우유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이 우유는 어디서 왔을까? 풀을 엄청나게 먹는 소는 절대 키울 수 없는 곳인데. 잠시 생각하다 나갈 준비를 하라는 말에 물어볼 시간을 놓쳤다.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 있는 마스지드-탑 아래로 납작한 사각형 집들이 구릉의 경사면을 촘촘히 덮고 있었다. 중간중간 섞여 있는 코발트 색 벽들은 지중해 주변 집들의 벽처럼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모래색만 보이는 흙벽들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해 일부러 칠한 것이겠지. 멀리 보이는 짙은 녹색 대추야자 숲이 주변의 붉은 땅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국적 풍경이었다. 진짜 사막도시에 온 것이다.


저기 공동묘지 보십시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멀리 황량한 빈터를 가리키며 무슈 무사가 말했다. ‘무사‘는 성경에 나오는 ‘모세’를 이슬람식으로 발음한 남자의 이름이다. 사람이 사는 구역, 대추야자 농장 그리고 공동묘지, 오아시스 도시를 나누고 있는 세 구역이었다. 묘지? 점점 가까이 가면서 메마른 땅에 바싹 마른 잡초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땅에 꽂혀 있는 도자기와 토기가 보였다. 형체가 온전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깨진 조각들이었다. 봉분도 없이 평평한 땅, 아이들이 뛰어다녀도 될 것 같은 이 공터가 얼마나 엄격하게 관리되는 신성한 땅인지 나중에 알았다.


건물을 짓거나 땅을 파지 말라. 나무를 심거나 길을 만들지 말라. 죽은 사람의 뼈를 파내거나 같은 장소에 다른 시체를 묻지 말라. 나무, 풀, 돌, 그 어떤 것도 가지고 나가지 말라. 용도 폐기했더라도 무덤을 가로지르지 말라. 가축이 풀을 뜯게 하지 말라. 절대로 이교도의 시체를 묻지 말라 등등. 세세한 규정들이 포함된 관습법이 넓은 공동묘지를 지키고 있었다. 이것을 어기면 중한 벌을 받는다. 그런데 성스러운 땅은 왜 이렇게 소박한가? 충격적이었다. 메마른 땅, 집들, 건물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묘지만큼은 아니었다. 가르다야에 다녀온 뒤부터 알제리를 다니면서 묘지들이 찾아보게 되었다. 저 멀리 보이는 흰색 영묘를 둘러싸고 자세히 보아야 겨우 알 수 있는 공동묘지들은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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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서는 24시간 안에 망자를 매장하게 한다. 12~15시간이 지나면 기도를 올리고 묘지로 가서 묻는다. 화장을 하지 않는다. 몸이 사라지면 부활할 수 없다고 믿는다. 시신을 씻겨 흰색 수의로 싸는데, 지하드(성전)에서 죽은 사람은 예외다. 피에 젖은 옷을 그냥 입힌 채 매장한다. 관을 쓰지 않는다. 흙 속에 그냥 묻는다. 시신을 뉘일 수 있을 정도 60~70㎝ 깊이로 판 구덩이에 머리를 메카 방향으로 두게 하고 안치한 후 흙을 덮는다. 무덤은 장식하지 않으며 자리만 표시한다. 봉분이나 비석은 물론 없다. 이러한 이슬람 계율이 그처럼 황망한 묘지의 풍경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슬람은 죽음을 기독교보다 훨씬 담담하고 금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종교 계율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그들이 살고 있는 생태환경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곳, 바위를 볼 수 없는 마른 모래 땅에서 목관이나 석관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아마 그에 대한 대답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시작되는 경계선에 있는 시장-수크에 안내해 주었다. 늘어선 상점들에는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로 번잡했다. 흰색 빵모자를 머리에 얹고 길게 내려오는 원피스 아래로 아코디언처럼 주름이 잡힌 회색 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머리 위에 얹은 작은 모자는 늘 궁금증을 일으킨다. 어떻게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두상에 맞도록 주문 제작하는 것일까? 머리를 수북하게 기른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머리를 기르면 그 납작한 모자를 쓸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키가 별로 커 보이지 않았고 몸집도 대체로 가늘어 보이는 사람들, 뭔지 차분하고 쌀쌀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여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집에만 있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번잡한 곳을 벗어나 한적한 길에 들어서니 머리부터 종아리까지 흰 천을 덮고 있는 삼각형 실루엣들이 문득문득 보였다. 깜짝 놀랐다. 유령들이었다. 온몸을 흰 하이크로 감싼 채 검은색 단화를 신고 몇 명씩 걸어가는 그 유령들이 여자들이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볼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던 완고하게 전근대적인 모습이었다. 눈 하나를 빼고 온몸을 꼭꼭 여민 차림의 여자들의 한쪽 눈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는 광채가 강렬했다. 그렇게 느껴졌다. 외부와 소통하는 모든 감각을 닫고 한 눈으로만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상상하기 어려웠다.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 하이크를 들추고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해 보았으면… 나의 희망은 나중에 이루어졌다.


집들 사이에 난 구불구불한 골목은 너무 좁아서 사람과 당나귀 밖에 다니지 못했다. 돌을 잔뜩 담은 바구니를 등 양편에 달아 매고 좁은 골목을 올라가는 당나귀를 보면 너무 가엾어서 돌 하나라도 대신 들어주고 싶었다. 집안에 들어가면 중정이 있고 중정을 중심으로 둘레에 방이 배치되어 있어 방들이 아주 어두웠다. 해가 비치는 낮에도 방 안이 어두워 촛불을 켜야 했다는 프랑스군의 기록도 읽었다. 햇빛이 퍼붓는 곳에서는 그처럼 어둠을 갈망하게 된다. 바짝 붙어 있는 집들의 바깥 벽에는 창문이 없고 대추야자나무로 만든 대문만 있었다. 드물게 아이들이 골목에 나와서 노는 집을 빼고는 모든 문들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나타나 매섭게 쳐다보더니 아이들의 손을 잡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므자브 사람들은 알제리에서 만난 사람들 중 제일 배타적인 사람들이었다. 북부의 베르베르인 카빌리 사람들보다 더 심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남자들의 시선은 경계심이 가득했다. 양편에 작은 상점들이 쭉 이어지는 좁은 시장 골목에 들어갔을 때였다. 한 노인은 나를 쏘아보며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옆 사람이 말리는 것으로 보아 그리 유쾌한 말은 아닐 것 같았다. 세계 많은 곳을 다녀 보았지만 이방인에 대한 그 정도 반감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


외눈박이 여자들, 시선이 곱지 않은 남자들, 뭔가 심상치 않은 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곳에 가면 으레껏 해왔듯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혼자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특별한 손님으로 대접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위키피디아 검색의 ‘역사’ 항목을 다시 찬찬히 읽으며 아주 중요한 특징을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므자브는 대단히 견고하게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종교공동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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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초기 갈라져 나와 박해를 받으며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라비아반도로부터 이집트, 튀니지를 거쳐 지금의 사하라 사막 북단까지 집단 이주한 종교공동체는 한때 왕국을 건설하고 번창하며 한 세기를 보낸 역사도 있지만,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 본산이나 정착지 원주민들의 배척을 받아 계속 쫓겨 다니며 이주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아무도 더 이상은 그들을 괴롭히러 오지 않았다.


그들이 정착하기로 결정한 오아시스는 높이가 비슷비슷한 모래 구릉지 사이사이로 물길 자국들이 서로 얽히고 패어 있어 ‘쉐브카’, 즉 ‘그물’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몇 년에 한 번씩 물이 흐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가장 큰 물길 자국 이름이 므자브(M’zab)였고, 그 일대를 므자브 계곡이라고 불렀다. 1013년 첫 도시 ‘엘-아퇴프’가 건설되었고, 300년 정도 지나 ‘베니스겐’과 ‘부누라’, ‘가르다야’와 ‘멜리카’ 총 다섯 도시가 120㎞에 걸쳐 완성되었다. 미국 국방부 오각형 건물을 ‘펜타곤’이라고 부르듯 프랑스인들은 ‘다섯 도시’, 펜타폴이라고 부른다. 총인구 14만 명, 가서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그 척박한 모래 땅에서는 있을 수 없는 숫자다.


므자브의 펜타폴은 천 년 넘는 역사를 뒤로 하고 21세기 현재까지 건재하고 있다.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진 종교공동체가 있을까? 미국에 전통적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종교공동체가 있지만 그 역사는 몇 백 년에 불과하다. 흐르는 물줄기도, 솟아오르는 전혀 없는 그 메마른 모래 땅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동안 모여 사는 것일까? 땅속에서 물을 길어 올려 키워야 하는 대추야자 밖에 자라지 않는 곳에서? 궁금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수다스럽지 않았다. 자신들이 얼마나 합리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이야기하며 알아주기를 바랐지만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긴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슬람 이바디파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632년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어떻게 지명해야 하는지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분쟁의 씨앗은 그때 벌써 심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도회는 ‘칼리프’, 즉 후계자를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신자였던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겨우 2년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이어서 2대와 3대 칼리프로 오마르와 우스만이 선출되었지만, 그 둘은 연속적으로 살해되었다. 4대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으로 무함마드의 딸 파트마와 결혼한 알리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직전 칼리프였던 우스만의 추종자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알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 담판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일부 신도들이 그의 해결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알라의 대리자로 절대적 힘을 가진 칼리프가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거나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원칙에 충실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결국 알리를 살해했다. 이들을 대열에서 벗어난 ‘이탈자’ 즉 ‘카와리지’라고 불렀다. 이슬람에서 갈라져 나온 첫 종파였다.

카와리지파 가운데 가장 온건했던 ‘이바디’ 파는 아라비아 반도를 떠나 서쪽으로 이주했다. 이집트를 지나 튀니지에 정착했다. 그곳에 살고 있던 베르베르인 개종자들이 생겼다. 교세가 늘어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아라비아반도의 이슬람 본산에서 군대를 파견해 공격했다. 공동체는 더 서쪽으로 이동했다. 알제리 중부 티아레트에 정착하고 왕국을 건설해 1세기 넘는 동안 번창했다. 또다시 공격을 받았다. 멸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건조하고 더 척박한 남쪽 사막 가장자리로 떠났다. 우아르글라에 정착했다. 그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떠나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40년 만에 다시 떠나 사막이 시작하는 경계선에 있는 오아시스까지 내려갔다. 므자브 계곡이었다.


므자브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간직하기 위해 유랑과 이주를 선택했던 절대 순수주의자들이었다. 알라의 말씀 쿠란을 깊이 있게 읽는 것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원리주의자들이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도 특권도 인정하지 않는 절대 평등주의자들이었다. 종교적으로 엄격하고 편협해서 같은 이슬람교도라도 종파가 같지 않으면 기도에 오게 하거나 금요일 기도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며, 멀리 떨어져 살게 하고 아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가르다야에서 내게 숙소를 마련해 주고 사람을 시켜 므자브를 안내하게 해 주었던 촌장 무슈 누흐가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오만 대사관부터 찾았다. 알제리 대사관이 아니고 오만 대사관이라니? 곧 이해했다. 오만은 같은 종파에 속하는 나라였다. 국적보다 종파가 우선하는 것이다.


* 첫 번째 사진은 구글 이미지의 것이다. 인물을 직접 찍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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