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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관 Mar 08. 2024

해빙

                                                                          

어쩌자고 꽃에게 약속을 했을까. 벚나무 망울이 부푼다. 내가 한 것인데도 날짜를 모르겠고 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가 재촉인 것만 같아서 저릿해지는 것이다. 입구 계단참에 눈사람이 서 있던 자리의 둥그런 물 자국이 겨울이 남긴 주소인 것도 같고 상형문자로 쓴 눈사람 유서로 보여 머뭇거렸다. 생각이 많아 속부터 녹았을 거라. 입춘이니 저도 예감하는 게 있어 심장이 두근거렸겠지. 누가 빠르게 스쳐 걸으면 옷 입은 눈사람 같다.     

감정의 도로망처럼 직선형 테이프 자국이 포장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사통팔달 못 갈 곳 없는데 외롭다는 사람들만 늘어가는 걸까. 가는 동안 흩어지지 말라고 단단히 여몄겠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 테고 당신을 향한 마음이 이렇게 견고하고픈 바람이겠지.      

녹아내린 심장을 보냈다는 증거로 이별의 날에 영수증을 증거로 삼아보려는, 사면복권을 간구한다는 연인의 시나리오를 상상했다. 심장이 칼자국 자욱한 테이블 같다는 대사 한 줄 넣어주고 싶다. 택배가 애착의 근거가 될 테니까, 전부를 들킨 셈이니까 영수증은 소용없는 일이다. 전부를 내놓아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큰 포장지에서 버스 뒷좌석에서 신문지로 가리고 키스하는 연인을 그려보았다. 잔디밭에 앉으면 옷 젖을 테니 완충비닐을 깔아주고 싶었다.     

나 자체가 지옥이니까 어디로든 나를 발송해주면 고맙겠다. 봄바람을 전부 비용으로 써야겠지. 사계절을 견딘 유리가 매인 것 없다는 듯이 햇살을 통과시킨다.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이홍섭, 「서귀포」)처럼 우체국 창이 서쪽으로 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일반은 도착확인 안 된다는 안내를 못 들은 척했다. 등기는 틀림없이 도달하기에 받고도 대답 없다는 것에 시달리고 일반우편은 못 받을 수도 있다는 피난처가 있기에 그리 한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기억하려 애쓰지 않고 불행한 사람은 못 잊는 것들이 많다. 겨울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 녹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스러질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말을 얻어 시가 되었다. 해빙된 속살거림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악수할 것도 아니지만 주머니의 손을 꺼냈다.     

낮이 길어져 햇살이 남아돈다. 우체국 주차장에 가득 쌓여있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상(李箱)은 상자라는 상(箱)을 필명으로 했으니 택배를 예감한 시인 아닐까. 그가 보낸 택배엔 시와 몇몇 여인들이 동승했을 것이다. 건축가였으니 우체국 설계도면도 넣었으리. 아무도 없어서 쓸쓸하다고 하려다가 붙들 것 없어 자유롭다는 문장으로 메모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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