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리는 퇴직금 털어 개업한 점포다. 점포라니? 열면서 꽃이 되니까. 이른바 계절매장이지. 퇴직금이 낯설겠지만 꽃도 한 계절 근무하는 직장인이니까. 격무의 겨울을 견디는 동안 하나하나 적립한 꿈들이 꽃잎이겠지. 겹겹으로 싸여서 비밀을 간직한 경력자 같다. 해마다 돋아나 경력자가 아니라 묵은 것을 새롭게 보여주니 숙련자의 기법이다. 끊임없이 제 존재를 증명하는 모습에 경건함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도 땅속 미물(微物)이 꿈틀거리고 꽃은 제 숭어리 안에서 치장하느라 분주하리라. 나처럼 어리석은 자는 설레발치다가 제 풀에 실망하고 현자는 기다린다. 봄은 멀었는데 나른함이 전신을 덮는다. 실존적이게도 입맛이 줄면 마트를 생각하곤 했다. 등기로 꽃을 부쳐주고픈 사람은 주소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개업 한 달은 손님 붐비는 걸 '개업발'이라더라. (대출 받으면 겁나듯이 겁먹은 돈은 이길 수 없다. 시절 꽃은 필패 업종이고 지지 않는 것은 없었다). 상춘객을 불러 모으니 개업이다. 그러다 진달래, 목련 철쭉 같은 유사업종들이 즐비하게 개업하면서 사람들의 달뜬 마음도 시나브로 잦아들고 이름도 모르는 채 혼자 사위겠지. 꽃 필 때나 벚나무 같은 이름을 불러보다가 이파리만 무성해지면 다 잊고 단풍놀이에 열중인 것이 생의 시나리오다. 꽃에서 단풍을 떠올리는 것도 건강한 건 아니다. 고로, 과거에 투자하다간 미래가 가난해진다. 포슬포슬한 꽃 지고 나서야 그 추레한 수피(樹皮)가 눈에 들어오는 산수유가 있고 또 수피가 추레해서 볼품없는 복자기 나무는 단풍이 압권이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면 유행가 같으려나.
자투리땅에 꽃나무 심은 집들을 지나치며 그리운 얼굴들이, 가고팠던 장소들이 순서 없이 떠오른다. 나란히 앉아 볕을 만끽하는 화분들도 애완견으로 보인다. 이제 만감의 시절인가보다. 전화해봐야지, 별 일 없을 거라, 무심하다고 흉보려나 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속으로만 맴돌던 인연들이 꽃과 나무가 된 듯이 다가오는 것이다. 썰물처럼 서서히 떠나는데 막을 수는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 이토록 미욱한 인간이기에 반복을 지겨워했는데 현자는 거기서도 새로움을 찾아 즐길 것이다. 내가 예민한 건 예지력을 가진 게 아니라 지레 겁먹는 바보 아닐까 싶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공포소설 쓰는 짓을 했더랬다. 나이 든다는 것은 반복에 강해지는 현상 아닐까.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을 간직한 사람은 늙지 않는다.(Franz Kafka)
각설하고, 트로트나 틀어야겠다.
목련 꽃잎은 속살 같아서 뒤로 젖혀 휘어지는 여인 허리 느낌이다. 허공 보는 척하며 꽃만 시선으로 더듬는 것이다. 커피 사러간다는 핑계대고 라일락 아래 당신을 세워두었다. 꽃이 꽃을 재촉하면 사내가 하는 것보다는 서둘러 피어날 것 같았다. 당신 연보라색 코트에서 라일락향기가 나풀거릴 것만 같았다. 봄이면 한국어를 조금 할 수 있는 외국인 인듯 다 아는 것 척 나부댔더랬다. 낙담들의 혈연(血緣)과 눈물의 출처를 보지 못했다. 애인처럼 꽃을 자주 찾았다. 장소를 느끼기 때문에 단골은 꽃이라는 간판을 보지 않는다. 내 심장에서 하나, 둘 피어나고 있다. 의지로는 멈출 수 없는 감정들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