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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관 Apr 07. 2024

프레임

  

수백 년 전 철학자가 지금도 영업을 계속하는 까닭은 질문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세들에 대한 격정적 반론도 없으니 실수 할 기회도 없다. 나는 자문자답에 지쳐 실수가 많았다. 소모전에 몰두하는 바보인 것이다. 나이 들면서 욕망, 거짓말 같이 예리한 자문(自問)들을 뭉뚱그리는 간교함만 늘었다. 그것들을 시로 우아하게 포장하는 문장기술까지 터득했다.  

    

불면 권태 같은 희미한 불행의 신호를 감지하지 못하고 시집만 파고드는 오후들이 많았다. 작은 풀꽃을 보면 당신에게 한 송이 꺾어주고픈 마음이 일었는데 목련만은 천사가 내려다보는 것만 같아 그런 생각도 못했다. 주일 학교의 어린이처럼 당신과 함께 가만히 서있었다. 독신인 천사가 연애를 알겠냐만 그는 진심에 대해선 전문가일 테니 설렘의 진위를 감정(鑑定)해달라 하고 싶다. 시라는 독재정권 밑에 시달리다가 내 거짓말에도 기울여줄 것 같은 당신에게 귀순하련다.

      

카메라 프레임 바깥의 엑스트라처럼 애써봐야 헛일이라고 실망했다가 이러다 감독 눈에 들지도 모른다고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는 것이다. 감독은 어디 있는지, 내 생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묻고 싶지만 답을 알면 싱거워질 것 같아 모른 척하며 살았다. 천사는 조명담당인지 내 심장의 컴컴한 곳만 비춰주었다. 그 덕분에 환해지고 외출해서 공원의 물무늬를 바라보곤 하였다. 건강한 적은 정정당당 승패를 가를 수 있으니 무섭지 않은데 병든 적은 수단을 안 가리고 그악스럽기에 피하고 싶다. 내안의 그 적이 병든 것 같아 두렵다.   

  

돌아오니 택배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택배시대의 유서는 '부재시 문앞'일 거라고 웃기도 하였지만 부재는 외출을 의미하니까 은둔보다 긍정적 아닐까. '화장 완료 후' 라는 예약발송 메일을 써놓을까 하다가 떠나면서 남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나눠주는 짓이라서 취소해야겠다. 두렵건 싱겁건 간에 ‘미래는 갑자기 등장하지 않는다’.(올리비아 랭). 나처럼 소심한 인간에게 예고된 것은 불안이라는 화약이다. 기다리는 내내 그 화약을 꾹꾹 누르다가 제 감정에 폭발해버린다. 사소한 것들에게 지고 살았다. 


어제 갔던 석촌호수 벚꽃들이 내 뇌리에서 한참은 피어있을 것이다. 거기보다 춥다는 일산은 이제서 한창이다. 사람꽃에 밀려가며 올려다보던 꽃보다는 손닿을 것 같은 창밖 벚꽃 송아리를 가구로 주문하고 싶다. 얼마만한 상자에 담겨올까. 취할 수밖에 없는 꽃 시절이니 술잔은 11월까지 넣어두자 했다. 그때는 더 큰 잔을 꺼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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