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그리움 설렘 아쉬움을 합하면 백색이 되는 것일까. 눈 온다. 스무 살 무렵의 과호흡을, 마흔의 번민을 어제 일처럼 펼쳐준다. 감당하기 힘들 거라는 둥 하늘거리며 눈 온다.
‘백색의 계엄령’(최승호,「대설주의보」)은 울렁거리는, 애련(哀戀)에 젖는 마음을 다잡으라는 뜻이었다. 이 칼날 같은 세상을 살아내려면 그리해야겠지. 뜬금없이 설믜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지혜'의 순우리말이다. 즉 ‘눈+썰미’는 눈의 지혜라는 뜻이다. 눈썰미를 쌓아놓아야겠다.
사실 즐거울 것도 없는 나날인데 흥겨운 척하며 나를 속이기에 눈보다 좋은 핑계가 어디 있을까 생각했다. 덤덤함을 떨치겠노라 결심하고 반복하다가 지쳤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그림자를 떼어내지 못한다. 아둔한 자는 그것에 진저리치지만 현자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해가 질 때를 기다릴 것이다. 천변만화하는 감정이기에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눈 오는 날은 누구라도 비슷비슷할 것이다. 묘한 안도감이 생긴다. 불안 같은 것들도 사람 누구이거나 다 품으면 날카로움이 무뎌지는 가보다.
발자국 없는 공터를 보면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들고 그것이 흐트러질 까봐서 까닭모를 죄책감마저 번진다. 고요함에서 비롯되는 것들 아닐까. 우산 들고 한손으로 적당히 접어 넣었던 전단지를 꺼내놓았더니 천천히 펼쳐진다. 국수집의 습기 때문일 것 같다. 종이는 흠뻑 젖으면 되돌아가지 않는데 평평하게 펼쳐질 만큼의 습기는 얼마일까 가늠해보았다. 그런 약이 있다면 했었다. 복전함에 접어 넣은 지폐가 펼쳐지는 시간이 기복의 유통기한 일 거라고 쓴 적 있다. 세상은 종이가 아니어서 젖어도 돌아온다. 체념하지 말자.
눈은 천사가 덮어주는 이불이다만 하루면 들통 나는 솜씨일 뿐이다. 기도발이 좋다는 곳에서 지폐 들고 줄서는 일보다 저기 주유소에 줄선 자동차들이 실용적이다. 기름 가득 채우고 가고픈 곳으로 내달리는 게 진정한 기도다. 다 털고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축복이다. 보통사람이라면 눈을 느낄 테고 시인은 눈을 표현하고픈 욕망에 만감이 소용돌이 하는 것이다. 문장중독자의 표현요구는 시키지도 않은 숙제다. 악필이어서 못생긴 눈사람을 만드는 걸까. 울퉁불퉁하게 완성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말을 걸다가 엉덩이가 녹는 것이었다. 체온은 때때로 거추장스럽다. 손을 잡았는데 너무 따듯해서 울컥한 적도 있었다.
함박눈 맞으며 호수공원 갔는데 도착하니 다 녹아서 춘설(春雪) 느낌이다. 버스에 앉은 동안 1월부터 3월까지 흘러간 셈이다.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 타인과의 거리도 적절히 유지한다. 눈을 즐기되 가슴이 눈에 젖지는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