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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관 Mar 09. 2024

무량

     

봄비 속살거리고

안개까지 자욱해 아슴아슴 젖어드는데 

화엄사 가자하네   

  

기가 센 곳이라 일주문부터 쭈뼛했었지

만발하는 흑매가 보통 귀신은 아니다 싶어    

벽사 삼아 마들가리를 주워왔었지     


입에만 담아도 무거운 화엄보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당신에게 간질밥 먹여도 될 것 같은 

부여 무량사를 고집부리네

사미*처럼 파르래한 눈웃음도 무례는 아니고

석탑을 데우는 볕처럼 무량하고 사무치는 봄날이라

전생부터 이생의 우환들을 널어놓고 싶네 

극락전 처마선이 당신 플레어스커트만큼 황홀하다고 

너스레 떨어놓고는 딴청부리겠네     


배롱나무 아래 골똘한 당신은

뒤꿈치에 자운영 보랏빛을 묻혀오겠지 

쿡, 쿡 옆구리 찌르며 천치처럼 웃으려고

내 팔꿈치에 복사꽃 연분홍을 바르고 싶네

꿀 발라 경단을 빚듯 벌들이 잉잉거려서

물색없이 마른침을 삼켜보네    

 

돌아오다 무창포의 지는 해를 보고 

봄보다 가을을 먼저 배운 사람처럼 헛헛해져서

꿈만큼 잘 놀고는 시무룩해질 것이네      


발 벗고 여울 건너던 당신 종아리처럼

사는 일이 환했다가 아슬아슬

추워라     


 *⦗불⦘십계를 받고 불도를 닦는 어린 남자 승려. 사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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