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텀 히말라야 산행기_12
로지(산장)의 담요와 이불. 그 특유의 향취는 이제 더 이상 맡지 않아도 된다. 포카라의 숙소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깨끗한 호텔. 통상적 우리네 호텔이라는 이름에는 모자란 시설이지만 그래도 약간의 고급스러움까지 챙기려 한 인테리어가 눈에 띄는 곳이다. 침구 역시 꽤 괜찮은 편이다. 사각거리고 푹신한 이불이라... 정말 오랜만이었다.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에 힘입어 쾌적함이라는 기분을 오랜만에 맛보며 오전 내내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트레킹 중 끄적였던 대단치 못한 산행기는 내려와서 읽어보니 일기장을 써놓았다. 단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잊히는 느낌을 기록하려 이리저리 덧붙여본다.
오후가 되어서 산행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한국인 트랙커와 한국인 식당에서 소주에 삼겹살을 먹었다. 몸이 얼마나 원했겠는가? 고향의 그 맛을. 가격이 높다고 한들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배불리 먹고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서 식당 노천에 앉아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Angelia'는 리처드 막스의 그리 알려지지 않은 트랙이지만 이 한 번의 청음은 향후 몇 년간 그 음악을 가장 즐기는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음악이 기억의 저장매체라고 한다면 이 만한 기억은 값어치가 높게 마련 아닐까.
저녁 이후 현지 여행사 네팔리들과 급작스럽게 술자리에서 친구가 되고 포카라의 유명 라이브 펍에서 모두가 뒤섞여 춤을 추고 놀았다.
새벽 몇 시 인지도 모를 시간. 펍의 입구에 걸터앉아 한결 가까워진 포카라의 밤거리를 가만히 본다. 네팔의 거리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지만 새벽에 이곳에 앉은 나는 사실 그다지 어떻게 되어도 아쉬울 게 없는 기분이었다. 아직 이틀의 일정이 남아 있지만 왠지 내 마음은 산에서 내려온 이후로 곧장 한국으로 돌아가버린 것 같다. 아무리 핑계를 대어봐도 나는 인생에서 첫 번째 맞이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해 이곳으로 왔었고 그렇기에 산을 벗어나 맞이한 여정과 여흥에 흥미는 있어도 여유는 없었다. 특히 휴양도시에 가까운 포카라는 그 한가로움이 매력이지만 그걸 느끼지 못하는 나에게는 왠지 모를 지루함을 안겨줬다. 일요일 밤 심야영화가 끝났는데 일어나지 않고 있는 기분.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밤공기를 맡으며 숙소에 돌아와서는 밀려두었던 인터넷 도파민에 흠뻑 젖어들었다. 도망쳐 떠나온 곳의 여러 밤들과 다르지 않은 그런 밤의 맛이었다.
산은 나를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산은 단지 그곳에서 오는 이에게 길을 빌려주고 가는 이를 멀리서 바라본다. 좀솜에서 저녁 내내 바라보았던 그 고봉은 답답한 인생의 답을 찾는듯한 내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다음날 버스를 타고 다시 8시간을 달려 카트만두의 한인민박으로 돌아왔다. 이제 정말 하룻밤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든 의미 있게 보내려 했던 기억이 난다. 사원에 들러보고 우연히 만난 젊은 스님과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날 공항에 도착했을 즈음부터는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피난처라 생각했던 그 산, 불편함이 있었던 그곳에서 돌아온 것을 다소나마 안도했던 것 같다. 나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고 내게 고난이라 생각했던 그 경제적 상황은 그 간절한 도피와는 별개로 얼마간에 걸쳐 몇 배 이상 더 어렵고 힘들어졌다.
다시 도피할 수도 없을 만큼.
남겨진 사진을 바라보며, 그때의 단견적 사고로 무장한 나를 바라보며 '인생은 한 번뿐이기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그 시절을 가끔 곱씹어본다. 매달 한 달 뒤를 고민해야 했던 그 시기. 설익은 채로 사회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던 그런 젊음의 생채기 속에서 저런 신념이라도 가지지 않으면 삶이 너무 별 볼 일 없게 느껴졌던 그 혈기의 끝에서 만난 히말라야는 단적으로 내게 외적 요인은 아무것도 바꿔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려주었기에 후로 내 인생은 첫 번째 작은 톱니가 돌듯이 천천히 나 스스로를 바꾸어 나가게 되었다.
'돌아가거라 중생이여...'
산이 내게 준 해답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어떤 날은 와이프에게 넌지시 이야기해 본다. 아들이 크면 그곳에 함께 다녀올 것이라고. 하나 크고 작은 네팔의 비행사고는 일어날 때마다 언론에 대서특필 된다. 얼마 전 사고 이후에는 나도 와이프에게 그곳에 가리라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산은 수십억 년 그 자리에 있었겠지만 그에 비해 찰나에 사라지는 운명인 우리 가족의 안전이 지금의 내겐 더 중요하다.
8년이 흐르며 때로는 술자리에서 자랑하듯 그 산들 얘기를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진정 알려주고 싶어 그곳을 얘기했다. (역시 알려줘서 간 사람은 없었다) 또 어떤 날은 하염없이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향취를 곱씹었다. 지금의 나는 베가본더 같은 마음은 사라졌다. 척박한 히말라야보다 여행이 윤택한 캐나다 록키나 스위스의 알프스를 원하고 있는 듯 모든 것은 그렇게 바뀌어 갔다.
한 번만 가는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어쩌면 내 인생이 히말라야는 한번 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내 삶에 또다시 그곳을 찾을 날이 온다면 그때는 산에게 얘기하고 싶다. 이번에는 도망친 곳의 천국을 기대하고 오지 않았노라고.
롱텀 히말라야 산행기_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