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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협 Apr 16. 2024

#강운구 작가

시간의 빛

낯선 작가의 책이 나를 사로잡고,

그와 만나며 또 다른 낯선 작가를 소개받는 일을

나는 지금 계속하고 있다.


시인 박준으로 시작해서

허수경으로, 이문재로 그리고

이번에는 강운구로 이어졌다.


얼마 전에 읽은 이문재 시인의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에는

강운구 선생의 사진들이 흑백으로

그의 산문들과 어우러져 곳곳에 담겨 있었다.


이문재 시인이 디지털 사진기를 선물로 준

어린 딸에게 읽히고 싶었다는 책이 바로

강운구의 <시간의 빛>이다.


강운구 선생 나이 환갑이 넘도록

켜켜이 쌓아온 사계절의 조각들을

사진으로 담고 글로 풀어쓴 책이다.


시인 박준과 한 해를 보내고(<계절 산문>에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또 다른 한 해를

강운구 선생과 보냈다.


이렇게 한 달 동안 한 해를 두 번씩이나

보낸 나는 그렇다고 나이를 먹진 않았다.

책이 주는 묘미 중 하나다.  


◆ 책 읽다가 날것 그대로 쓰다   ​


강운구 선생. 찰나의 순간을 사진과 글로 남기시는 분. 그로 인해 오늘 나는 눈과 마음이 호강을 누리고 있다. 이런 귀한 책들이 도서관 외진 한구석에 무명한 것처럼 꽂혀 있는 현실이 조금 안타깝다. 신간만 쫓는 것을 나쁘다 할 순 없으나 그때 그 시절 신간으로 나와, 유명해진 이런 책들을 만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30년이 넘는 직장 생활 동안 나는 전투적인 자세로 자기 계발서, 인문학, 그리고 경영서 등을 무턱대고 읽어 나갔었다. 거의 실무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다만 잠시라도 읽어야 편했던 것 같다. 놓으면 큰일 날 것처럼. 그동안 잃어버린 문학의 세계를 이렇게 찾아가는 요즘이 좋다. 이 기쁨이 봄기운과 함께 더해지는 날이라 더욱 감사하다.


'봄은 조심스럽게 돌다리를 두드리며 오는 시늉을 하다가 갑자기 사라진다.(p62)' - 이 문장처럼 이 책 속의 봄도 갑자기 사라졌다. 이제 여름이다. 현실 속의 나는 봄이 그 절정을 향해가고 있는데... 아이러니하다. 그게 책이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나를 마구 데려가기 때문이다.


'앞으로 똑바로 간다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자리에서 큰 원을 그리며 빙빙 돌다가는 마침내 쓰러지는 조난사고가 있다... 이런 것을 등산가들은 링 반데룽(Ring Wanderung)이라고.(p203)' - 이런 걸 들어는 봤지만 '링 반데룽'이라는 단어는 처음이다. 열심히 잘 살고 있다는 자기 확신 속에 어쩌면 나도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상, 루틴이라는 말에 이 단어를 늘 견주어 볼 일이다. 더하여 강운구 선생의 이 물음도 기억하고 싶다. '그런데 그런 일은 고산의 설원에서 보다 우리가 헤매는 삶의 수렁 곳곳에서 더 흔히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김훈의 발문(p251-255)' - 김훈 선생과 강운구 선생의 친분이 담긴 일화가 엿보인다. 김훈은 그가 어디를 가던 사물을 깊이 관찰하고, 사진도 그렇게 많이 찍는 편이 아니라고 했다. 이 책이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졌기에 더욱 믿음이 간다.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  


향내 나게 커피 잘 뽑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녹차 잘 우려내기는 더 어렵다. 주린 배 채울 땐 아무것도 가리지 않지만 부른 배 다스릴 땐 까탈 부리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차 향내나 그 밖의 다른 향내를 밝히면서도 사람 향내는 풍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찻잎이 그렇듯이 사람도 자라면서 점점 타고난 향내를 잃어버리고 떫은 맛만 낸다. 향내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사람 냄새라도 풍기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것은 마침내 사람이 향내를 풍긴다는 것이 아닐까?


녹차의 향내처럼 은은한 사람의 향내가 배부르게 먹은 몸 냄새가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어찌 모를까마는. 예전에 차 좋아했던 초의 선사나 추사 선생은 아직껏 우리에게 향내를 풍긴다.


- 강운구의 <시간의 빛>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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