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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Dec 11. 2023

20년 전 그 동네는 여전하고

커버린 건 나뿐이야

부산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아침에 찍은 파도.

여름 경찰서라는 말은 귀엽다.

부산은 아직 낙엽들이 싱싱해.

박원욱 씨처럼 지하철 역에 이름이 새길만큼 열심히 살고 싶어서 찍었다.

오늘은 기억 마주하기 연습을 했다.

부산은 잊고 싶은 도시이고, 이제 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20년 전에 살았던 동네에 다녀왔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는데도 파크랜드는 굳건히 이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초등학교 앞 육교도 여전했다.

6년을 오르락내리락했던 언덕길.

여기는 원래 분식집이었다.

피카츄를 500원에 사 먹었는데.

원래 문방구였던 자리.

피카츄 살 돈을 모아서 안정환 브로마이드를 산 게 기억나.

학교 뒤 아파트.

어릴 때 우리 집은 화장실 휴지를 3칸 이상 쓰면 이모에게 혼날 만큼 가난했다.

그래서 저곳에 사는 친구들을 매우 부러워했다.

지금 다 커서 보니까 ‘그냥 아파트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지금의 나는 많은 걸 가지고 있나 봐.

5학년 때 운동회 날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남자아이 손을 잡았었다. 랜덤으로 뽑은 종이에 적힌 사람과 손을 잡고 뛰어와야 하는 게임이었는데, 바로 눈앞에 부반장이 있어서 냉큼 잡았었다.

걘 뭐 하고 살까?

철봉이 있었는데 없어졌네.

또 뭘 짓나 봐.

학교 앞에 리본가게가 생겼더라.

이 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신기했어.

이제 학교를 벗어나 살던 집 근처로 가본다.

육교는 여전해.

어릴 때 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얼마나 싫었는지 몰라.

낙엽이 예뻐서 찍었다.

어쩌면 이 육교에 떨어진 낙엽은 매년 내 눈앞에 놓여 있었는데

그때의 나에게는 낙엽 따위가 눈에 들어 올 여유가 없었겠지.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던 피아노 학원.

운영을 안 한 지 오래되어 보였다.

선생님이 날 예뻐하셔서 콩쿨도 나갔었는데 지금은 피아노를 전혀 치지 못한다.

여기는 달고나 할아버지 자리였다.

슈퍼였는데... 예전 모습 그대로다.

내 기억 속엔 이 계단이 참 가파르고 높은 계단이었는데, 오늘 보니 너무나 아담한 계단이었다.

어린 시절 내 눈엔 분명 무서운 계단이었는데 말이야. 내가 많이 컸다고 느꼈다.

슈퍼였었는데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

동생이 돈 단위를 배우기 시작할 때, 10원짜리 10개를 주며 이게 금색이라 더 좋은 거니까 네가 가진 500원이랑 바꾸자고 속였던 기억이 났다.

여전한 것들도 있다.

자전거를 배우던 골목.

네 발자전거 연습하던 날들이 생생해. 그러나 아직도 저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답니다.

학교 갈 때 항상 여기로 내려갔었는데.

여기 바로 뒤에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첫눈에 반한 6학년 근오오빠가 살던 집이 나온다. 화분을 들고 고백했던 기억이 난다. 내 고백을 듣고 도망간 오빠의 뒷모습도...

여기는 학원 가던 골목.

옛날 모습 그대로랍니다.

이곳은 원래 풍년쌀집이었는데 없어지고 주차장이 생겼다.

어린이집...

버려진 건물.

여기를 보고 갑자기 울컥해서 울어버렸다.

그대로구나...

공중전화가 있던 자리에는 원래 인형 뽑기가 있었는데 처음 빠졌을 때 아빠가 거래처와 계약을 하기 위해 마련해 둔 계약금 봉투에서 2만 원을 몰래 훔쳤다. 인형 뽑기에 미쳐서 아빠가 오는 것도 몰랐는데 뛰어 온 아빠에게 먼지 나게 맞았었다. 때리는 아빠를 피해서 할머니 방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 이불 안에 숨어서 엉엉 울었었다. 그러나 바로 끊지 못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맞았다는 그런 이야기.

이 골목의 서점에서 바람의 나라 책을 팔았었는데 뒤에 쿠폰이 있어서 용돈을 조금씩 모아서 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결국 레벨 40짜리 전사 캐릭터를 은정이에게 4천 원 주고 샀다.

사철식당에서는 원래 보신탕을 팔았었다.

떠돌아다니는 진돗개(이름은 해리, 해리포터가 처음 나왔던 해라 해리라고 지어줬다.)를 주워와서 키웠었는데 어느 날 하교하고 집에 왔더니 강아지가 없었다.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밥으로 장난치던 내 동생의 손을 물어서, 보신탕 집에 10만 원에 팔아버렸다고 했다.

엉엉 울면서 집에서 여기까지 뛰어왔던 기억이 난다. 도착했을 때 해리는 이미 죽은 후였다.

여기 맞은편에 퐁퐁 타던 곳이 있었는데

30분에 500원이었다.

자주 다니던 목욕탕.

엄마가 빙그레 바나나 우유는 비싸다고 절대 안 사줬었다. 그래서 아직도 바나나 우유만 보면 욕심이 생긴다.

4층에 있던 학원을 다녔었는데 영어 선생님이 나를 엄청 예뻐해 주셨었다. 선생님이 나를 편애한다고 학원을 그만둔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영어를 제일 좋아했었다. 이 동네에 엄마와 할머니 외에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꽤 위안이 됐었다.

선생님, 저는 그 이후에 미국에 가서 공부를 했어요. 종종 선생님을 생각했어요.

학원이 끝나면 항상 어묵을 사 먹던 곳이 있었던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서 걸었더니 얘가 나타났다. 겨울에 외할머니가 떠준 하얀 뜨개 목도리를 하고 먹다가 떡볶이 국물이 튀어서 엉엉 울면서 집에 왔던 기억이 난다. 쓰면서 보니 어릴 때 엉엉하고 많이 울었었나 보다.

동네에 다녀오고 나니 울적해졌다. 묵은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간 거였는데. 변함이 없다는 게 이렇게 싫을 수 있구나.

차라리 재개발이 되어서 다 없어졌더라면 속이 편했을까. 그래도 기억을 마주한 나를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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