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대 아빠의 어느 하루
마흔을 넘어서니,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점점 옅어져 갑니다. 앞으로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를 테고, 그러면 언젠가는 그 시절의 추억과 영영 이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시절, 1980년대엔 사진기의 필름이 귀해서 지금처럼 사진을 자주 찍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순간들이 오롯이 기억 속에만 남았지요. 그중에서도 잊고 싶지 않은 한 장면이 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 어딘가, 아파트라고 부르기엔 소박하고 작은 마을, 제가 태어난 고향에 봄이 찾아왔던 그날입니다. 어머니는 다섯 살도 안 된 제 볼을 따뜻하게 어루만지셨고, 저는 세 동짜리 5층 아파트 창 너머로 노란색, 분홍색, 하얀색 꽃들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눈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때는 무엇이 아름다운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보고 느끼기만 해도 좋았습니다.
시간이란 이상해서, 힘든 시간을 지날 때는 너무 더디게 흐르는 듯한데, 유년의 순수하고 따뜻한 시간은 어느새 지나버려 되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십 대가 되었고, 그 시절의 저는 '꿈'이라는 단어 앞에 겁 없이 다가섰습니다. 아마도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현실의 거친 바람이 불어도 어머니의 따스한 품과 아버지의 든든한 등 뒤에 몸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부모님의 보살핌 아래서 저는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성실을 무기로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보답할 줄 아는 어른이 되자고요.
그렇게 다짐하고 맞이한 이십 대. 첫 직장을 잡은 후에도 세상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군대처럼, 상사가 시키는 일을 빠릿빠릿하게 처리하면 칭찬을 받았고, 반대로 버벅대거나 상사의 의견에 토를 달면 혼이 났죠. 간단히 말해, 잘하면 칭찬을 받았고, 못하면 혼나는 단순한 원리였습니다. 그러니 그땐 그저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저의 삶이 바뀐 순간, 그렇니까 '어른의 삶'이 시작된 것은 아마도 지금의 아내를 만난 뒤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젊은 그녀는 빛났고, 저는 그 빛에 매료되었습니다. 사랑에 빠지자 제 눈에는 뒤 늦게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저는 가진 것은 없어도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현실이라는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보니 중소기업, 몇 천만 원도 없는 통장 잔고, 한 겨울에도 여자친구와 시내버스를 타고 데이트를 해야 하는 삼십 대 초반의 별 볼 일 없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내가 결혼 전에 ‘커피 소년’의 콘서트에서 ‘그대 내게 올 때’를 들으며 펑펑 울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현실의 냉혹함에도 부족한 저를 사랑해주는 그녀의 마음을 알게된 그 순간, 저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초라함'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실력을 쌓기 위해 어떤 일이든 배우겠다고 결심했죠.
그 후,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중국 출장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고, 끼니를 거르면서도 부족한 잠을 쫓으려고 하루에 서너 잔씩 커피를 마시며 수백 통의 전화와 메일을 대응했습니다. 낮에는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붙들고 있었다면, 밤이 늦으면 고객을 접대하기 위해 어둑한 뒷골목을 서성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힘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렇게 삼십 대를 초라함을 친구 삼아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십 년을 버텨낸 덕에 비록 대출이 있지만 작은 아파트를 갖게 되었고, 가족이 탈 차도 한 대 마련했습니다. 남들에게 내밀 수 있는 명함도 생겼고, 무엇보다 어디서든 굶지 않을 실력 하나는 갖추게 되었죠.
저는 이제 제가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남은 삶은 평온하고 안정된 일상, 마치 장기 방영된 전원 드라마처럼 평범하게 흘러가리라 믿었습니다. 저는 이제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되어 평화로운 하루를 반복해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짜인 각본처럼 제 생각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후, 초라한 상황을 참아낼 각오가 되어 있다면, 최소한 부당한 상사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십 대는 직장에서 리더로 성장할 마지막 기회의 시기였고, 조직과 상사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능력보다는 그들에 대한 충성이었습니다.
그들의 불합리함에 눈을 감아야 했고, 부당함 앞에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비굴함의 쓴맛은 초라함과는 또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라함을 견디며 노력해 온 나날이 비굴함에 닿지 않길 바랐지만, 초라함도 비굴함도 그 어느 하나 가장이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저는 '초라해도 괜찮아'라는 글을 마무리하여 브런치 스토리에 투고했습니다. 제 이야기가 비굴함으로 이어질 줄은 알지 못한 채 말이죠. 저는 세상 속에서 한 명의 바른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양심 있는 사람, 다정한 어른이 되어 아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아버지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저를 가만두지 않았고, 비굴함의 씁쓸함이 매일 제 입 안에 맴돕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모든 평범한 아빠들의 이야기일 겁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는 세상을 바꿀 정도의 영향력이 없습니다. 아니, 상사의 부당한 지시조차 바꿀 힘조차도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스스로에게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는 것뿐입니다.
최근 회사에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껴 올해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연속 휴가를 냈습니다. 안갯속의 이십 대, 초라했던 삼십 대도 잘 헤쳐왔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작은 보금자리도 있고, 부모님께서도 건강을 되찾으셨으며, 침몰할리 없는 큰 배에 올라타 있으니 이번에도 잘 헤쳐 나가겠죠.
비록 세상에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저 자신만큼은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양심에게 미안한 비굴한 오늘을 보냈을지 몰라도, 적어도 진실된 내일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저의 비굴함에 대해 용서를 바라야 한다면 언제든 양해를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는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는 아직 작은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작은 배를 끝까지 목적지까지 순항시켜야 하는 사람, 저의 이름은 '아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