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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련 Aug 05. 2024

클로디아 랭킨, 『시민』(4)

Claudia Rankine, 『Citizen』(4)


II.


‘예술 생각’이라는 튜토리얼을 유투브에 올리는, 제이슨 머슨으로도 알려진 헤네시 영맨은 구독자들에게 동시대 예술 이슈에 대해 알려준다. 수많은 영상 중 하나에서 그는 성공적인 흑인 아티스트가 되는 방법을 다루며 흑인의 분노는 시장가치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비꼬듯 한다. 흑인 아티스트가 되려면 일하면서 로드니 킹 영상 같은 것을 보며 “분노한 니거 이미지”를 가꾸라고 조언한다.



영맨의 조언은 흑인에게 기대되는 것들을 폭로하는 동시에 흑인 아티스트들이 실제로 분노를 소화해내려 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려움을 강조하고자 한다. 영상에서 주장하는 상품화된 분노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므로 겉에만 머무른다. 그건 특정 개인이 특정 상황에서 가지는 감정 상태라기보다는 마치 카드놀이를 하듯 사용되거나 꺼내 쓸 수 있는 흑인성의 수행과 연관돼 있다.


이렇게 상품화된 분노와 “아티스트” 사이를 잇는 곳에, 때로는, 실제로 분노가 자리한다. 영상 속에서 영맨은 이러한 분노를 다루지 않는다: 경험으로, 피부색 하나 때문에 모든 갈색이거나 검은 사람들이 살아내는 비인간화에 대한 일상적인 저항으로 쌓이는 분노 말이다. 이 다른 종류의 분노는 오래될수록 외로움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생겨나는 일을 막아설 수도 있다, 장려하지 않고.


당신은, 틀릴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분노가 사실은 지식의 한 종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건 명확하게 하는 동시에 실망하게 한다. 당신에 대한 모욕이나 지우려는 시도에 대해 존재를 주장하는 단순한 반응인데, 그 존재하고, 반응하고, 주장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본능적으로 실망감을 수반하는 것이다: 더 잘 보이게 된다 한들 보여지는 방식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실망감 말이다.


이러한 부재를 인식하는 일은 당신을 깨뜨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인식으로 인해 지우려는 시도가 촉발하는 지움이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이걸 알아차리는 게 더 고독하더라도 더 건강한 자아를 만들어주는지, 당신은 알 수 없다. 아무튼 영맨은 이러한 종류의 분노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분노의 표현을 목격하는 일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군가를 “미쳤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미쳤다고 생각한다, 어느 일요일 오후, 아놀드 파머를 마시면서, 2009년 미국 오픈의 여자 결승전을 보고 있는데, 세레나 윌리엄즈가 갑자기 폭발적인 언행으로 당신의 정신을 온전히 집중시킬 때. 고화질의 세레나는 당신의 눈 앞에서 당신에게 낯이 익으며 당신을 위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배웠던 어떤 분노에 사로잡힌다. 하필이면 이 일요일에 일어난 세레나의 행동은, 그녀의 화려한 커리어 동안 겪어왔던 모든 불의가 그녀의 눈 앞에 주마등처럼 펼쳐지고 있으며 한 줄기의 욕설로 그것에 대해 드디어 반박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아무것도, 심지어는 그녀가 더 젊을 때, 2004년 미국 오픈에서 비슷한 상황에서 그녀가 사용했던 반복적 부정(“아냐, 아냐, 아냐”)마저도, 당신을 이 일에 대비시키지는 못한다. 어떡해, 미쳤나 봐, 라고 당신은 아무도 없는데 말한다.


역사적으로 하얀 공간 안에서 승리하거나 패배한 검은 여성의 몸은 어떻게 보이나? 세레나와 그녀의 언니인 비너스 윌리엄스는 조라 닐 허스턴의 “나는 내가 밝은 흰 배경 앞에 내던져졌을 때 가장 검게 느껴진다”를 떠올리게 했다. 플라스틱 글자 스텐실, 번지는 오일 스틱, 그리고 흑연을 이용해서 단어를 추상으로 변환한 글렌 리곤에 의해 차용되어 캔버스에 박힌 이 문장은, 모든 검은 몸이 겪는 삶의 일부에 대한 광고 카피 같았다.

허스턴의 문장은 세레나와 비너스에 의해 여러 번 재생된 적 있다: 그들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다친 적 있으며, 기뻐한 적도, 슬퍼한 적도, 외면당한 적도, 거세게 야유 받은 적도(인디언 웰스에서는 2001년부터 자매를 보이콧했다), 응원 받은 적도 있으며, 그러는 내내 그리고 분명하게 그들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분노한 이들이 있었다—흰 배경에 칠해진 흑연.


수년동안 당신은 세레나 윌리엄즈에게 영화에서나 볼 법한 종류의 회복 탄성을 부여한다.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언니도 여호와도 신도 나이키 캠프도 그녀의 검은 몸이 그들의 경기장 위에, 그들의 세상 안에, 설 자리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로부터 완전히 보호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세레나가 테니스 경기장보다는 밀레의 그림 속 2차원 현실 안에서 생존하려고 분투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이들은 처음부터 여럿 있었다—터너의 그림 안에서 배가 폭풍 속에서 분투하듯 오래된 각본 속 소란에 휘말리기보다는 그들의 환상처럼 땅을 일구는 모습에 그녀의 힘을 쓰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II.


Hennessy Youngman aka Jayson Musson, whose Art Thoughtz take the form of tutorials on YouTube,  educates viewers on contemporary art issues. In one of his many videos, he addresses how to become  a successful black artist, wryly suggesting black people’s anger is marketable. He advises black  artists to cultivate “an angry nigger exterior” by watching, among other things, the Rodney King video  while working.



Youngman’s suggestions are meant to expose expectations for blackness as well as to underscore the  difficulty inherent in any attempt by black artists to metabolize real rage. The commodified anger his  video advocates rests lightly on the surface for spectacle’s sake. It can be engaged or played like the  race card and is tied solely to the performance of blackness and not to the emotional state of  particular individuals in particular situations.


 On the bridge between this sellable anger and “the artist” resides, at times, an actual anger.  Youngman in his video doesn’t address this type of anger: the anger built up through experience and  the quotidian struggles against dehumanization every brown or black person lives simply because of  skin color. This other kind of anger in time can prevent, rather than sponsor, the production of  anything except loneliness.  


You begin to think, maybe erroneously, that this other kind of anger is really a type of knowledge: the  type that both clarifies and disappoints. It responds to insult and attempted erasure simply by  asserting presence, and the energy required to present, to react, to assert is accompanied by visceral  disappointment: a disappointment in the sense that no amount of visibility will alter the ways in which  one is perceived.  


Recognition of this lack might break you apart. Or recognition might illuminate the erasure the  attempted erasure triggers. Whether such discerning creates a healthier, if more isolated, self, you  can’t know. In any case, Youngman doesn’t speak to this kind of anger. He doesn’t say that witnessing  the expression of this more ordinary and daily anger might make the witness believe that a person is  “insane.”



And insane is what you think, one Sunday afternoon, drinking an Arnold Palmer, watching the 2009  Women’s US Open final, when brought to full attention by the suddenly explosive behavior of Serena  Williams. Serena in HD before your eyes becomes overcome by a rage you recognize and have been  taught to hold at a distance for your own good. Serena’s behavior, on this particular Sunday  afternoon, suggests that all the injustice she has played through all the years of her illustrious career  flashes before her and she decides finally to respond to all of it with a string of invectives. Nothing,  not even the repetition of negations (“no, no, no”) she employed in a similar situation years before as  a younger player at the 2004 US Open, prepares you for this. Oh my God, she’s gone crazy, you say to  no one.  


What does a victorious or defeated black woman’s body in a historically white space look like?  Serena and her big sister Venus Williams brought to mind Zora Neale Hurston’s “I feel most colored  when I am thrown against a sharp white background.” This appropriated line, stenciled on canvas by  Glenn Ligon, who used plastic letter stencils, smudging oil sticks, and graphite to transform the words  into abstractions, seemed to be ad copy for some aspect of life for all black bodies.  


Hurston’s statement has been played out on the big screen by Serena and Venus: they win sometimes,  they lose sometimes, they’ve been injured, they’ve been happy, they’ve been sad, ignored, booed  mightily (see Indian Wells, which both sisters have boycotted since 2001), they’ve been cheered, and  through it all and evident to all were those people who are enraged they are there at all—graphite  against a sharp white background.  


For years you attribute to Serena Williams a kind of resilience appropriate only for those who exist in  celluloid. Neither her father nor her mother nor her sister nor Jehovah her God nor NIKE camp could  shield her ultimately from people who felt her black body didn’t belong on their court, in their world.  From the start many made it clear Serena would have done better struggling to survive in the two dimensionality of a Millet painting, rather than on their tennis court—better to put all that strength to  work in their fantasy of her working the land, rather than be caught up in the turbulence of our ancient  dramas, like a ship fighting a storm in a Turner seascape.



갈수록 어렵네요... 테니스 용어가 나오니 더 어렵습니다 테니스를 좀 공부해봐야겠어요. 시이기도 하고 산문이기도 하니 단어 하나, 문장 구조와 도치, 쉼표와 하이픈 하나의 고의성까지 생각하며 옮기려니 한국어 문장이 엉터리가 되는 느낌. 조언과 피드백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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