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 장애, 나이 듦의 교차성 (김미연 역, 현실문화, 2023)
“남성은 팔루스를 갖고자 하고 여성은 팔루스가 되고자 한다.”
제인 갤럽은 낡고 (그의 말을 빌리자면) “불쾌하”기까지 한 팔루스적 접근을 가져와 자신의 후발 장애 경험과 결합한다. 작가가 재정의하는 퀴어 팔루스적 시간성에 의하면, 규범적 시간성 개념에서 장애(혹은 노화)와 팔루스의 상실(거세)을 동일하고 영원불변한 것으로 바라보는 인식에서 벗어나 반복적/대안적 팔루스의 등장이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이미 거세된 자리(휠체어)에서의 팔루스 같은 것들 말이다.
이때의 규범적 시간성은 팔루스의 소유-거세를 바라보는 고전적 시간성으로, 영구함의 시간성이자 불변의 시간성을 의미한다. 규범적 시간성에서의 거세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후발 장애의 진단은 영구적 거세와도 같으며, 이는 또 걸레트가 칭하는 '쇠퇴 이야기', 즉 중년으로 접어드는 것, 노화를 겪는 것의 (말하자면) 스피드트랙과도 같다. 많은 후발 장애 진단 경험자들이 진단 경험을 "종신형"이나 "(순식간에) 중년이 되어버린 상태"로 설명하는 것이 이러한 맥락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시간성에서는 장애는 중년됨과 마찬가지로 섹슈얼리티의 상실, 즉 팔루스의 상실과 동일시된다.
그 결과 장애의 경험은 장애 그 자체에 있기보다도 상징적인/부차적인 경우가 많다. 갤럽은 자신의 장애 진단으로 인한 2차적 결과인 하이힐 박탈(-휠체어 신세)에서 거세를 경험했듯, 후발 장애 진단은 그 자체로 거세를 의미하기보다는 "아버지 되기 불가능", "직립 불가능"으로 해석되며 거세로 이어진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본질적이지 않으며 변화할 수 있다는 인식은 오랫동안 젠더 이론의 중심을 이루어왔다. 젠더는 상실되었다가 재정의될 수 있으며, 많은 퀴어들은 생애 전반에 걸쳐 그 과정을 수행하고 반복한다. 퀴어 섹슈얼리티는 생식적 섹슈얼리티 중심의 규범적 시간성과 본질적으로 결리되어 구성된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장애-섹슈얼리티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변화의 한 축과도 같다.
갤럽이 제안하는 대안적 시간성은 복구의 시간성으로, 규범적 시간성, 규범적 팔루스의 관점에서는 '도착적 팔루스'로 정의되는 팔루스의 경험에서 출발한다.『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도착의 황홀감"이라 설명되는, 갤럽의 경험 속에서 "휠체어에서의 팔루스"라 명명되는 이 개념을 통해서 본다면 장애는 영원한 거세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거세된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 팔루스다.
핑켈스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부치가 되기 위해 한 번 이상은 죽임이나 다름없는 것을 당했다. […] 그런데 [장애로 인해] 부치로 살 능력을 잃게 되는 상황에 부딪히면? 빌어먹을, 농담도 심하지.”
절망적으로 읽히는 문장이지만, 갤럽은 이러한 핑켈스타인의 젠더 정체성을 반복적 팔루스로 해석한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여성 >) (죽음) > 부치(젠더의 주장) > 장애(거세) > 크립부치(젠더의 재주장-팔루스의 회복)
붉은색으로 표기된, 부치가 겪는 젠더적 ‘죽음’과 재정의의 과정은 그 자체로 대안적/반복적 (팔루스) 시간성을 내포한다. 젠더 정체성을 퀴어링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핑켈스타인은 장애 진단으로 절망하는 듯 보이지만, 이후 책에서 설명되듯 ‘부치 장애인’으로서의 섹슈얼리티와 욕망을 지속한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라고 했던가. 퀴어 경험으로 죽지도 않고 돌아온 부치가, 장애의 경험을 통해 또 다시 자신의 몸과 욕망을 정의하고 있는 거다[1].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을 시간성의 측면에서 노화와, 탈규범의 측면에서 퀴어와 연결지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애 진단=종신형"의 (인식적) 공식[2]에서 장애의 시간성을 발견하고, 하이힐 vs. 휠체어의 경험에서 장애와 섹슈얼리티(특히 팔루스)의 관계를 탐색하며, 중년과 장애의 동일시 속에서 섹슈얼리티의 시간성을 짚어내는 갤럽의 시각은 무척 흥미로운 동시에 해방적이다. 우리는 흔히 후발 장애에 대해 장애 진단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한순간에 중년의 상태로 변신시켜버리는 것으로 인식하곤 하는데, 이는 장애인/노인에게 공통적으로 지워지는 무성적 존재라는 낙인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역사가 하이힐에서 ‘걸파워’를 발견하고 지워냈다가 다시 찾아냈듯, “도착적 팔루스”를 휠체어(혹은 그 밖)에서 발견한다면, 본질주의와 생식적 섹슈얼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1] 그러니 어찌보면 우리는 퀴어로서 이미 이 대안적 시간성을 몸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김(?)!
[2] 작가와 걸레트의 장애 진단 경험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