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쓴 김지혜 교수의 신간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제목을 모르겠다.
어디에 찾아보면『가족각본』이라고 나와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창비 인스타에서도 언니단 뉴스레터에서도 『OO각본』이라고만 소개되어 있고, 그건 출간 이전 퀴즈 때문이겠거니 했는데
서평단에 선정되어 받아본 가제본의 표지에도『OO각본』이라 인쇄되어 있다. (가족각본 맞겠지? 친구들한테도 그렇다고 여기저기 떠들어놨단 말이다...)
본책은 7장까지 있을 예정인가 본데 가제본에는 프롤로그부터 3장까지만 수록되어 있다.
프롤로그: 가족이라는 각본
1장: 왜 며느리가 남자면 안 될까
2장: 결혼과 출산의 절대공식
3장: 초대받지 않은 탄생, 허락받지 못한 출산
4장: 역할은 성별에 따라 평등하게?
5장: 가족각본을 배우는 성교육
6장: 가족각본은 불평등하다
7장: 각본 없는 가족
에필로그: 마피아 게임
아무튼 이때의 각본은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인위적이고 통제된 무언가를 의미한다. 이 책에서는 '가족'의 개념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가족 개념과 제도가 얼마나 '각본적'인지를 지적하는데, 그 지적의 지점을 도출해 내는 방식이 재미있다. 작가는 가족 개념과 제도에 대한 변화의 지점, 또 이에 대한 반발 혹은 이러한 변화로부터 파생되는 균열의 지점에서 각본을 발견한다.
"성소수자가 가정을 파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길 때, 그 걱정을 비틀어, 그리하여 지키고자 하는 가족은 무엇인지 질문해보면 어떨까. (...) 불편한 마음이 기존의 가족제도와 충돌하기 때문이라면, 역으로 말해서 그 충돌의 지점에 가족각본이 있다는 뜻이 된다."
유독 '남자 며느리'를 내세우며 분개하는 혼인평등 반대 진영(?)의 논리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내포하는 가족 내 며느리와 사위, 여-남의 성역할이라는 각본을 발견하고, 비혼/동거/퀴어 관계의 결혼과 출산을 둘러싼 엄격한 잣대 안에서 헤테로 중산층 결혼-출산의 필요충분 관계라는 각본을 발견하는 식이다.
이러한 각본은 비단 퀴어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제한된 형태의 정상규범 기반으로 하여 성소수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소수자를 억압하기에 이르는 것으로 설명된다. 동성혼, 동성부부의 출산, 트랜스 남성의 출산 등 퀴어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결혼, 출산, 가족구성권은 비혼 여성, 저소득층, 장애인, 이주노동자에게도 허락되지 않거나 정부/정책에 따라 선택적으로 허용 혹은 금지의 구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할 결혼, 출산, 가족구성이라는 권리가 가족각본으로 점철된 사회 속에서 특정 이들에게는 수여하거나 빼앗을 수 있는 것이 된다. 각본에서 규정한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은 각본 밖으로 추방당한다.
'OO각본'이라는 제목을 보고 또 책을 읽으며 사라 아메드의『행복의 약속』을 떠올렸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행복에 대한 추구'는 사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이상('행복 대본')에 맞추고 이를 따라야 한다는 의무이자 규범이다. 이 행복 대본 속에서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행복한 가족' 대본은 결혼과 출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혼+출산=행복"이라는 견고한 공식에 의해 결혼과 출산을 의무화하며 결혼과 출산을 원치 않거나 허락되지 않은 이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뿐더러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억압과 불행, 불평등과 부정의의 가능성을 소거한다.
무엇보다 행복 대본 속에서 추구되는 행복은 그 자체로 배제적이다. (행복한 가족 대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행복 대본은 정상규범의 내재화라는 '행복 공식'을 내세우는 동시에 행복을 의무화하는데, 이때의 공식에 해당하는 정상규범을 수행하지 않거나 이를 수행할 수 없는 이들이 '행복하지 않은(행복할 수 없는)' 상태는 이들 개인의 책임이 된다. 이들은 행복 공식을 수행하지 않으므로(수행할 수 없으므로) 행복할 자격이 없는 이들이 된다. 행복 대본 밖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에, 이들에게 대본 안에서 '행복하라'는 말은 '(너로) 살지 말라'는 말이 된다.
참 바보 같다. 아니 참 똑똑하다. 누가 썼는지 참 잘 썼다. 이 각본이란 것을. 놀라운 것은 이 각본이 사람들과 사회에 의해 다시 또다시 전해지고 대물림되며 강화되고 이(우)상화되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 속 능력주의 신화와도 같이 이러한 행복 대본은 누구든지 원하면 거머쥘 수 있는 것으로 비춰지지만, 사실은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누구든지'의 의미가 백인 시스-헤테로 중산층 비장애인 남성 어쩌구...로 한정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밖의 사람들은 성공을 강요당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성공을 박탈당하지만, 이는 "성공 공식을 알려줬는데 왜 그것을 따르지 않아"하는 질책으로 포장되고 만다.
김지혜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족에 대한 법을 소위 말하는 '선진국'의 기준*에 부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다른 분야에 비해 적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이는 곧 우리나라에서 가족에 대해서만큼은 기존의 전통과 규범, 즉 각본이 견고하여 이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제본에 포함되지 않은 책의 5장에서는 우리나라 성교육 시스템이 이러한 각본의 지속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다룬다는데 그 내용이 궁금하고, 7장에서 소개될 '각본 없는' 가족의 모습들이 얼마나 각양각색일지 기대되면서도 주류사회의 입장에서는 각본 밖의 '비정상'으로 분류될 이들의 삶이 분하고 속상하다.
각본 밖에는 각본이 없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새로이 써 내려가야 할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하며 여태껏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추방당한 이야기들이 모이고 쌓여 각본 밖 세상이 점점 넓어지다 보면, 언젠가 이 낡고 비좁은 각본이 더 이상은 기능하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결혼과 가족을 재정의하고, 행복을 재정의하며, 자신의 삶을 그저 삶대로 살아가고 있는 각본 밖의 우리와 우리가 써 내려갈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한다.
『소설보다 봄 2021』에 실린 나일선 작가의 「 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극장 너머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 뒤에는 극장이 있습니다. 출발점은 상상이었고 나는 진짜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뒤에는 언제나 상상이 있었습니다, (...)"
극장 너머에는 언제나 생명이 있기 마련. 상상은 한 발짝 앞, 한 발짝 뒤에서 우리의 삶을 휘젓겠지만 그 삶이 진짜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을 상상하며, 뒤를 상상하며, 상상 속에서, 상상 밖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 선진국이 어쩌구 한다고 해서 맞춰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서/북)유럽 국가 대부분의 가족제도가 우리나라의 가족제도보다 소수자를 포함한 국민의 인권을 평등하게 보장하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우리나라가 이러한 '선진국'들을 오랫동안 발전의 모델로 삼아 온 역사에 비해, (소수자) 인권 분야에 대해서는 유난히 도도한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 소설의 내용은 내가 인용한 목적과 해석과 완전히(?)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린다. 영화와 역사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무지 재미있는 소설이고, 가족각본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지만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 주장하며 냅다 갖다 붙여보았다. 처음 읽을 때, 소설이 무지 난해해서 한 문장 한 문장 읽으면서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맞을지 고민했다. 그런데 저 문장이 왜 마음에 들었을까. 맞는 말이라서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 게슈탈트붕괴 레전드... 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