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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련 Jul 15. 2023

괄호가 많은 후기: 엘리멘탈(2023)


엘리멘탈을 두 번 봤다. 스포 잔뜩이니 볼 사람들은 절대 읽지 마시길. (재밌게 본 사람도 안 읽는 게 좋을지도... 영화를 물고 뜯고 씹기 때문)


사실 1차 때는 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두 번째 볼 때는 쿨쿨 잤으나 음악소리 때문에 깨서 또 울었다. (깼기 때문에 울었다는 게 아니라 깬 후 음악 때문에 울었다는 뜻.) 자긴 했지만 짧은 간격을 두고 두 번 본 덕에 내용과 장면들이 생생히 기억난다.

엠버 예쁘다. 쇠그물로 된 자켓이 섹시해...


그렇게 곱씹어보니 영화를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상상이라기에는 현실과 지나치게 맞닿아 있고, 현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1) 엘리먼트 시티와 파이어타운


아마 뉴욕의 맨하탄을 염두에 두고 구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엘리먼트 시티. 문명과 기술의 최첨단 어쩌구를 달리고 물 공기 나무 불이 같이 살아가는 코스모폴리스. 샐러드볼이니 멜팅팟이니 하는 사회문화시간에 배운 그런 것으로 이루어진 도시. 비잉들은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고 그곳으로 온다. 건물들은 높고 반짝거리고 대중교통은 매끄럽고 종합적으로 (누군가의 주관 아래) 아름답다.


조금 떨어진 곳에 이민자 커뮤니티인 파이어타운이 조성되어 있다. 불나라에서 이주 온 버니와 신더가 나무로부터 렌트를 번번이 거절당하고 겨우 매입한 낡아떨어지는 건물을 중심으로 불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마을-구역으로 맨하탄에서 조금 떨어진, 뉴욕으로 따지자면 플러싱 지역의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 같은 느낌이 났다.



2) 역사와 도시의 설계


버니와 신더가 처음 엘리멘탈 역에 들어서는 장면에서 엘리멘탈 역의 천장벽화들이 비춰지는데, 여기에는 엘리먼트 시티의 역사가 물로 이루어진 first wave, 이후 흙과 공기로 이루어진 second wave, third wave로 그려져 있다. 그 그림들 속에서 물은 흙과 공기의 손을 잡고 그들을 도시로 맞이하고 있다*. 물과 흙이 탄 배가 들어오는 거대한 항구와 공기를 위한 비행풍선 데크가 있는 반면 불은 작은 배를 타고 들어오는 점이 일부 설명된다. 물이 일구어낸 문명 속에 흙과 공기는 자연스럽게 녹아든 반면 그들의 문명에 불은 해당되지 않는다. (불이 모든 문명의 시초인 것으로 여겨지는 인류의 역사와는 사뭇 반대되는,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약간의 아이러니가 있다.) 

당연하게도 도시는 물 위주로 설계되어 있다. 여기저기 조형을 위한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보이고, 흙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식당 의자에는 샤워기 비슷한 것이 설치되어 있고, 대중교통으로 사용되는 지하철 비스무리한 것은 물 위를 달리고 지나갈 때마다 사방에 물을 뿌린다. (불은 도시에 갈 때 우산을 챙기곤 한다.)



3) 분리


버니와 신더가 탑승한 지하철이 흔들리자 옆에 선 물에서 물이 튀어 신더의 머리쪽이 일부 꺼졌다가(소화되었다가) 그가 나무 몇 조각을 먹자 다시 타오르는 장면, 그리고 대머리인 흙에 튄 물로 인해 잔디가 자라나는 장면을 나란히 놓고 보면 불이 얼마나 이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도시에서 불은 살 수 없(을 것이)다. 사방에 그들을 위협하는 물이 너무 많다. (이런 장면은 실제로 물과 불, 흙과 공기가 작용하는 모습과 유사해서 재밌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들의 관계에 있어 과학적인 원리를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따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좀 어이없기도 하다. 불에 물 좀 튀면 치익 하면서 기화한다. 불비잉being이 될 정도로 옹골찬 불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인데 말이지. 흙도 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풀어지거나 썩을 테고, 물이 공기에 노출되면 서서히나마 증발할 것이며, 반대로 공기도 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우르릉쾅쾅 비구름이 될 텐데 불만 너무 약하다. 엠버가 모래에 앉으면 그것이 녹아 유리가 되는데, 나무 벤치에는 잘만 앉아 있는다. 시청에서 받은 종이 전단지는 잘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한 순간에 휘익 태워버린다. 엘리멘탈 속에서는 물도 불고, 공기도 나무도 현실의 그것들과 달리 각자의 성질을 때에 따라 조절할 수 있는 것이거나, 적어도 극적 효과를 위해 일부 통제되고 있다. (이렇게까지 트집을 잡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영화니까 통제와 조작은 당연한데 말이지. 아무튼 곳곳의 과학적 애널러지는 귀여운 수준에서 머무른다. 나보다 과학에 대해 유식하거나 진심인 사람이 보면 아마 조금 더 분개할 것.))


이러한 "과학적인" 이유를 제외하고서라도 불은 물과 공기와 나무로부터 차별받기 때문**에 도시 밖으로 내몰린다. 그들은 어디에서도 월셋방을 구할 수 없어 파이어타운(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지하철에서 불이 지나가면 그들을 흘겨보는 시선이 가득하고, 신더에게 물을 튀긴 물비잉은 사과 한 마디 않는다. 비잉들은 모두 서로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지만, 지하철에서, 또 경기장에서 몸을 구겨가며 양보하고 길을 비키는 이는 불뿐이다. 하지만 그런 불은 "안전"을 이유로 센트럴역에 출입할 수 없고, 그 사실은 센트럴역에 비비스테리아를 보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어린 시절 엠버에게 트라우마가 된다. (그곳을 결국 폐허로 만든 것은 홍수(=물이)다.) 엠버가 공기인 게일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게일은 엠버를 "파이어볼"이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인종적) 소수자를 향하는 멸칭과 다를 바 없어보인다. (이에 발끈한 엠버는 게일을 또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게일은 또한 이에 분노하지만, 그들이 놓인 상황과 억압의 맥락을 고려했을 때 두 별칭의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시티가 나오는 장면에는 엠버(그리고 잠시, 신더)를 제외한 불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파이어타운 주민들은 즐겁게 살지만 불이 엘리먼트 시티 바깥에 커뮤니티를 형성한 것은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4) 특권


이제야 엠버와 웨이드 둘의 이야기로. 물인 웨이드에게 가장 강력하게 입혀지는 성격적 요소는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주 "울기"로 나타난다. 웨이드는 엠버와 처음 만났을 때 엠버 가족의 가게가 불법적으로 건설되었으며 그렇기에 딱지를 떼야 한다고, 그 사실이 안타깝다며 눈물을 흘리지만 딱지는 떼어 상사에게 전달한다. 사실 그 장면은 (그 뒤에 그보다 웨이드에게 훨씬 슬플 법한 일들이 잔뜩 발생하지만 울지 않는 것으로 비추어 보아) 웨이드를 소개하기 위한 과장된 장치로 이해되고, 게일을 울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의 이별통보, 어머니와의 작별 이외에 "나비, 자동차 와이퍼, 자동차 와이퍼 반쪽,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놓쳤던 지난 여름날을 회상하며 후회하는 늙은 남자..." 같은 것들이다.


엠버는 불같이(당연함 불임...) 화를 내는 일이 잦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을 만한 좋은 딸이 되기 위해 정진해온 그는 쉽게 말해 "성깔만 좀 죽이면 완벽한" 딸이다. 하지만 그 성깔이 쉽게 죽여지지 않아 손님에게 화를 내고, 가게의 파이프를 터뜨리고, 시청 조사관인 웨이드와 엮여 가게를 잃을 위험에 놓이고, 그 사태를 수습하고자 찾아간 펀의 사무실을 몽땅 태워버린다. 엠버는 부모가 자신을 위해 감수한 희생을 되갚아야 한다는 부담에 억눌린 이민자 2세 캐릭터로도 낯이 익지만 소위 말하는 "K-장녀" 같은 것으로도 어렵지 않게 해석/공감될 수 있다. '우리 엄마아빠가 나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가 말 잘 듣고 열심히 살아서 호강시켜드려야지' 하는 멘탈리티는 개인적 감정과 욕구의 억압과 세대 간 불통으로 이어져 엠버 내 자아끼리의 충돌 같은 것으로 폭발한다.


웨이드와 그의 가족은 그런 엠버의 각성(?)을 환영하며 꿈을 쫓을 용기를 내라고 부추기지만 엠버는 그럴 수만은 없다. 엠버가 웨이드의 "rich kid follow-your-heart family"에서는 유효한 것이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소리칠 때가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속시원했던 순간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웨이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엠버더러 "강한 줄 알았는데 겁쟁이"라며 실망한 내색까지 한다(뻔뻔스러움에 혀를 내두를 따름이다).


여기서 내가 속시원했던 이유는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찝찝했던 것이 해소되거나 적어도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아마 엠버에 비해 웨이드가 놓인 특권적 위치와 그 권력차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려 하)는 둘의 사랑인 듯하다. 어쨌든 웨이드는 시청 조사관으로서 엠버 가족의 가게를 철거시킬 수 있는 권력을 지녔고 그런 경제적 위험으로부터 엠버를 '구원'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리고 끝내 구원한다. 젠장!) 엠버가 웨이드에게 그런 말을 다는 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어쨌든 이러한 위치적 차이를 인식하고 있으며, 엠버도 그것을 인식하도록 설정했다는 뜻일 테지. 이 영화가 그렇게까지 '꽃밭' 영화는 아니라는 뜻일 테지.


엠버의 능력은 물론 대단하지만, 그것을 웨이드(와 예술가로 이루어진 그의 가족)가 알아보고 웨이드의 어머니가 친구인 유리업체 사장(?)을 통해 엠버를 인턴직에 "꽂아줌"으로써 비로소 엠버에게는 꿈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진다. 반면 웨이드는 능력이 없어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가족들의 성원에 힘입어 너무나도 백인-중산층적인 개념이라 어질어질한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영화의 설정상 엠버는 훨씬 어릴 때부터 예술적으로 유리를 잘 다뤄왔겠지만, 그의 주어진 환경에서는 그것을 전문적으로 추구하기는커녕 꿈으로 생각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마음을 된 엠버가, 아버지의 꿈(현실에 적용한다면, 가족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엠버가 겁쟁이라서가 아니다***. (웨이드로서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을 만도 하다.)



5) 다름과 사랑


웨이드가 엠버를 이해할 수 없음을 들어 엠버는 그것이 둘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라고 한다. 이에 웨이드는 우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는 (상기한 것과 같이) 수천수만가지나 된다고 반박한다. '원소끼리 섞이지 않는다'는, 마치 진리처럼 받들어지는 원칙 때문에 엠버 할머니는 죽기 직전 "불과 결혼하라"고까지 했으며****, 둘의 사랑은 웨이드가 불이 아니기에 엠버 어머니로부터 증명될 수도 검증받을 수도 없다. 웨이드는 이런 이유에 더해 애시당초 너는 불이고 나는 물이니 우리의 관계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웨이드는 엠버와의 차이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대응한다.


(1) 동질화: 뜨거운 콜넛 먹기. 

(2) 낭만화: '너의 (납작하고 얄팍한 불적 특성)을 사랑해' 하는 것들. 가령 미네랄에 따라 색이 다르게 타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네 빛이 일렁일 때가 그렇게 좋더라" 같은 말 하기****.

(3) 지켜주기: (물로 된 도시에서 소수자인 엠버를 위해) 꽉찬 엘리베이터에서 막아주기, 비비스테리아 보여주기 등.

(4) 위험을 감수하기: 손 잡기, 함께 춤추기, 파이어타운에 구하러 오기. (기사도 정신도, 컴포트 존 밖으로 발 내밀 용기도, 앞뒤 생각 않는 도전도 가진 자들에게는 조금(훨씬) 쉽다는 것을 철저히 망각한 듯하다.)

(5) 힘을 합쳐서만 가능한 일 하기: 향에 불 피우기, (결말부) 콜넛 식혀먹기.


결국 이 모든 것은 웨이드의 말마따나 그가 엠버를 사랑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감수하지 않을 차이로 인한 불편들이, 애정 혹은 사랑 같은 감정 앞에서는 잠시 흐려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생전 먹어볼 생각하지 않았던 콜넛도,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았기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불 출입금지' 안내판도, 손이 닿았을 때 보글보글 치익 하는 감각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일 때에는 여태까지 '굳이'였던 것 앞에도 '어디 한 번'이라는 말이 붙기 마련이니 말이다. 엠버도 웨이드 덕에 비비스테리아를 만나고 자신의 예술을 사랑하게 되고 경계를 뛰어넘으며, 이전과는 분명 다른 비잉이 된다. 


사실 디즈니 영화로부터 그토록 섬세하고 정확하고 올바른 재현을 바라는 것부터가 잘못일지 모른다. 하물며 이 영화는 (현실의 문제들을 메타포로나마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애니메이션이고 소수자를 다루겠다는 주장을 한 적도 없으니. (물론 디즈니 정도의 자본과 영향력을 가진 회사라면 섬세하고 정확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메타포를 만들어 배포할 능력도 (어쩌면) 책임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디즈니는 몇 년 전부터 다양성과 포용성을 내세우며 기존의 만행을 만회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러한 방향성은 장려되어 마땅하다. 토크니즘일랑 소비자가 따끔하게 혼내줄 터이니 아무튼 계속하여 정진하도록...)


어찌되었든 사랑하는 일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충돌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불편하고 부대끼는 일이고 그런 점에서는 무지 멋진 영화다. 내가 불이고 네가 물일 때 우리가 서로 가까워지면 나도 너도 조금 고통스럽고 조금 위험할 것이다. 내가 소진되어버릴지도 모르고 너를 기화시켜버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가 손을 잡았을 때 네가 조금 보글보글, 내가 조금 치익치익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면, 아니 그 느낌이 오히려 짜릿하여 황홀하다면, 우리는 조금 더 특별한 비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욕심을 조금 더 부려서, 만약 우리가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 주변에 존재하는 경계들을 조금 흐릴 수 있다면. 그럼 더 다르고 그래서 더 특별한 사랑들이, 비잉들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그 누구도 원소로만 치환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고 디즈니다웠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쓰고 난 뒤) 나는 아무튼 괄호가 너무 많고 주석이 너무 많다. 트집이 많고 불만이 많다. 나를 검열하고자 하는 의지와 나까지 나를 검열해서는 안 된다는 감각이 치열하게 싸워 글이 어지러운 게 꼭 전쟁터같다. 그 모든 것이 모여 가부간 의미가 있겠지.



* 일단 이상하다. 물이 제1문명을 이끌었다면 제1문명은 왜 물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물과 공기, 나무와 불이 각각의 (편의상) 나라에서 문명을 이루며 살다가 (어딘가의 땅 위에) 엘리먼트 시티를 구축한 거라면 그곳에는 원래 살던 이들이 (하다못해 나무라도) 없었을까. 콜롬버스를 필두로 수많은 유럽 식민주의 열강이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낡은 문법이 비로소 비판의 대상으로 이야기되는 현시점에서 그런 얄팍한 설정을 두었다는 점은 제법 불편하다.


** 노골적으로 물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오히려 약자인 불이지만(가령 버니가 가게에 물 청소년들이 들어오자 경계하며 '물은 모두 같다'고 여기는 모습), 불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도시에서 기타등등이 고상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진정 차별없음을 의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리플네 집에 놀러 온 엠버에게 웨이드의 삼촌은 "우리 말을 참 잘한다"며 흔해빠진 마이크로어그레션을 남발하고, 버니와 신더가 처음 엘리먼트 시티에 왔을 때 그들의 이름은 버니와 신더가 아닌 불말이지만 출입국 직원에 의해 순식간에 버니와 신더로 이름지어지는 모습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 결국 엠버는 가족들과 원만한 합의를 보고 자신을 위해 희생한 웨이드의 사랑에 감동하여 꿈을 쫓아 떠나고 웨이드는 사랑하는 그녀를 쫓아 같이 떠나고...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나지만. 여전히 드는 찝찝함들이 있다.

(1) 인턴 기간 동안 엠버의 생활비는 누가 내나? 

(2) 웨이드 엄마에 의하면 엘리먼트 시티의 모든 건물이 유리로 되어 있고, 유리를 잘 다루는 이들 중에는 불이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어디에 있나? 그들의 노동력과 존재감은 어디에 있나? 엠버가 인턴십을 마치고 돌아와 성공한 유리 예술가가 된다고 한들 엘리먼트 시티에는 어떤 변화가, 어떻게 있을 거란 말인가? (엠버가 떠난 후, 영화의 에필로그쯤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버니와 신더가 은퇴 후 가게에서 콜넛을 먹고 있고, 그들의 친구가 가게를 물려받았으며, 가게에는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손님들이 들어와 화기애애한 모습이 담겨 있다. 하지만 도시에는?)


**** 특: 주로 엠버가 극심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을 때를 가리킴. 시니컬하게 받아들이자면 그렇다는 거다. 차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약점까지 모두 사랑하는 것, 가장 취약한 상황에서도 곁을 지켜주는 것은 실로 진정한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고, 웨이드는 그런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일 테지만, 백인을 기준으로 정의되는 미적 규범이 견고하게 버티는 사이 동양인의 '찢어진' 눈, 흑인의 '신기한' 머리 같은 것이 마치 한 철 유행처럼 페티시화되는 것이 현실이다. 수년간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 주류에 의해 한순간 '장점'으로 정의되고 소비된다고 해서 차별의 역사가 지워지지는 않듯이, 영화 속 대사들도 다수자(물)-소수자(불)의 관계 속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이것도 이상하다. 엠버는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엘리먼트 시티에 왔는데 할머니의 소원은 어떻게 들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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