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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련 Mar 11. 2024

[석순61] 모순을 끌어안고 살기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石筍 61집에 총총이라는 필명으로 실은 글입니다. 석순은 캠퍼스 곳곳에 오프라인으로 배포됩니다.


2023년 2월 3일. 반차를 내고 혜화역으로 간다. 내리자마자 휠체어가 잔뜩. 전장연[1] 활동가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피켓을 받아 들고 아는 얼굴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이 따갑다. 시끄럽다. 겨울인데 땀이 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그럼, 해야지’하는 생각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2023년 6월 29일. 파주 용주골 집결지의 성노동자들과 함께하러 파주시청 집회에 간다. 가는 길. 덥고 습하다. 비가 온다. 하필이면 이런 날. 가는 길에 고민한다. 성노동이 내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나는 이들과 왜 연대하지? 왜 연대‘해야’ 하지? 어느 순간 이런 곳에 참석하는 일은 습관이 되었다. 의무가 되었다. 내가 어떻게 정체화하는지, 고통과 불의에 공감하거나 분노하는지, 이런 것보다는 ‘가니까 가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도착했다. 보라색 우비를 나누어준다. 지각한 탓에 피켓이나 안내를 받지 못한 채 가장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다. 이따금 구호를 외치며 생각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나도 성노동자 같을까?’ 그 답이 ‘예스’이기를 바라는지, ‘노’이기를 바라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수치스럽다. 생각하는 내가, 바라는 내가.


2023년 8월 19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후원 파티에 간다. 앞쪽에 서 있는 셰어의 대표 나영과는 이전에 인턴 할 때 간혹 통화를 했었다. 도착하니 리셉션에 자원활동가로 참석한 친구가 앉아 있고, 저쪽 입구에는 공연을 하러 온 건지 내가 좋아하는 가수 이랑이 보인다. 비건 뷔페를 기다리는 줄에, 포토존에, 리셉션에, 익숙한 얼굴들이 많다. 편안하다. 따뜻하고 환대받는 기분. 내 사람들을 찾은 것 같다.


축하공연을 위해 모어[2]가 등장한다. 기분 좋지만 약간 기괴한 음악에 몸을 이리저리 꺾으며 흔들며 찢으며, 모어가 옷가지를 하나둘 벗어던지기 시작한다. 재킷을, 조끼를, 바지를… 남은 건 가방과 하이힐과 새빨간 장미가 프린트된 빤스뿐. 모어가 가방을 붙잡는다. 그것을 자기 가랑이 쪽으로 가져와 한 손으로 움켜쥔다.


조금씩 벗겨지는 빤스.


보인 것 같아.

왜 그렇게 고추에 천착해? 보일 수도 있지.

기분이 이상해. 편안하지 않다.

그게 왜 불편해?

내가 이렇게 느껴도 되나? 이렇다고 말해도 되나?

그동안은 편안했어?

상상 그 이상이다. 너무 충격적이고 낯설고…

새롭고 짜릿하다.

방금 뭔가 머릿속에서 살짝 부서진 것 같아.


이거지.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고?


타자됨은 다양해지는 것, 분명한 경계가 없는 것, 너덜너덜해지는 것,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 (도나 해러웨이, 2019)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은 주류로부터 밀려난 이들이 펼치는 ‘사이보그 정치’를 선언하며 본질주의와 이원론의 탈피, 아웃사이더들의 연대, 그리고 이중성을 끌어안는 경계에서의 삶을 주창한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구 근대주의의 근간이 되는 ‘이성적’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를 아우르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기술의 발달과 인간에 대한 탐구는 오히려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데 이르렀기에, 근대적 이분법은 입지를 잃어가며 이른바 ‘해러웨이안 사이보그’들이 등장하여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보그들은 타자성과 차이, 그 자체로 연결된다. 차이야말로 연대의 밑거름이다. “주체됨은 환상”이며 순수성은 거부된다. 주체로서의 ‘나’조차 인간과 비인간의 언저리 어딘가의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 또한 불명확해진다. 나는 타자가 되고, 경계 위에서의 삶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 경계 위에서의 삶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분법이 아닌 이중성을 포용하는 삶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살아갈수록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미궁으로 향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나를 설명하고 정의할 언어를 찾는 일은 나에게 또 내가 ‘우리’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다. 억압적 정체성과의 불화에서 벗어나 ‘우리’의 언어를 찾는 건 그야말로 유포릭euphoric한 경험이었다. 그러니 다시금 나의 타자성을, 나의 불화함을 인지하고 끌어안기란 어렵고 두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해러웨이가 말하는 경계boundary란 인간에서 비인간(혹은 주체인 나에서 타자, 남성에서 비-남성 등)으로 넘어가는 그 지점, 즉 해러웨이에 따르면 사이보그가 되는 관념적 지점을 일컫는다.  나는 여기서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 영어단어로 margin(가장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소외/주변화 등을 의미하는 이 단어의 파생인 marginalize이 어근 margin에 형용사형 접미사 -al과 동사형 접미사 -ize가 붙은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단어는 ‘가장자리에 놓기’ 정도로 직역할 수 있다. 이 단어는 대체로 피동 형태로 쓰이기에, 소외된marginalized 이들은 다시 말해 가장자리에 놓인–위치된–이들이며, 어근인 margin이 해러웨이의 경계boundary와 갖는 유사성을 근거로 해러웨이가 말하는 경계에서의 삶 또한 일종의 강제성 혹은 타의성을 지닌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류에 의해 밀려난 변방의 비주류다. 우리는 “그들”에게 편입되지 못한 아웃사이더다. 이 얼마나 억울한가. 변방에서 서로를 발견한 우리 간의 연대는 또 얼마나 끈끈한가.


해러웨이는 ““우리”는 본래부터 사이보그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다”며 이러한 주변적 삶의 타의성을 일부 시인한다. 다만 선택이라는 것 자체의 자유주의 이념적 근접성, ‘순수한 피해자성’이라는 신화에 따르는 다층적 억압 등을 지적하며 해러웨이는 사이보그가 이로부터 벗어난 ‘사생아적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유별남, 타자성, 비주류성을 규정하는 사회에 맞서 이를 긍정하는 자긍pride과는 약간 다른 것을 의미한다. 나를 긍정하는 일은 내게 무척 해방적이다. 다만 나는 자주 나를 부정한다. 나는 내 정체성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 말로는 나의 수치심과 죄책감, 나의 우월감과 불안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체로 온전하다. 그러나 온전함은 허상이고 억압의 도구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이보그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은 우리는, 그러나 사이보그로서 “진짜 삶”을 살아간다. 그뿐이다. 그 삶은 순수하지 않으며,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사람이 아니기도 하다. 여자이기도 하고, 여자가 아니기도 하다. 소수자이기도 하고, 소수자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당신과의 연대가 불편합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소인위[3] 위원장이 되고는 무작정 엉덩이부터 내밀고 봤다. 행동부터 연습하면 머리와 마음이 따라오겠지 생각했다. 한 번은 기후정의 행사에 단위를 대표하여 참여하기로 약속했는데, 당시 나는 기후정의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다급히 도서관을 찾아가 기후정의에 관한 책 중 가장 가장 얇은 것을 빌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초동모임 장소로 향하는 길에서 겨우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모임에서 그 책의 내용을 앵무새처럼 읊으며 자괴감에 휩싸였다. 내 지식의 얄팍함이 들통날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쫓겨날 것 같았다[4]. 아무리 공부를 해도, 여러 자리에 나가고 사람들을 만나도 자격과 정당성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다. 어딜 가든 의문이 함께한다. 내가 나설 자격이 있나? 내가 목소리를 낼 만큼 잘 알고 있나? 내가 이 사람들과 왜 연대하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애초에 나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나의 자격 있음과 없음, 나의 정당함과 정당하지 않음, 나의 수치, 나의 긍지. 그러고 보면 늘 둘은 함께였다. 그것이 버겁다면, 그래.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기 때문이리라. 내게 연대라는 건 이런 불확실성을, 이중성을, 모호함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의 반복이다. 그러면서 나의 생각은 다양해졌고, 분명하던 경계는 흐려졌고, 나의 마음은 어쩌면 제법이나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는 사이, 엉덩이는 익숙해졌다. 광장에, 인도에, 때로는 아스팔트 도로인 그곳에.


나는 저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문제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 (잠재적) 당사자성을 강조하는 식의 감정호소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네 딸이라고 생각해 봐라”, “너도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묘하게 저주스러운 이런 문구에는 왠지 거부감이 든다. 너무나도 쉽게 반박이 가능할 뿐더러, 인간종種의 정서적 능력을 회의懷疑하며 이기심과 두려움이라는 일차원적 감정에 연대와 공감이라는 복잡다단한 기제를 의탁하는 얄팍한 논리다. “너도 언제든 저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저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감독 트린 민 하는 영화를 통한 말하기와 당사자성의 문제를 논하며 ‘근처에서 말하기speaking nearby’의 개념을 제시한다. ‘근처에서 말하기’란 말하기의 주인공-대상을 다룰 때 작가(감독)인 나는 “오직 근처에서, 즉 가까운 거리에서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자각을 바탕으로,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는, 일종의 거리두기를 의미한다(캐시 박 홍, 2021). 다소 소극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 과정은 그러나 단순히 판단의 유보 혹은 ‘나의 일이 아니므로 나서지 않음’과 다르다. ‘근처에서 말하기’의 핵심은 무엇보다 나의 위치에 대한 솔직한 인식, 타자의 삶에 대한 존중, “대상과 무척 가까워지면서도 그것을 차지하거나 빼앗아 버리지 않는”–대상화하지 않는–태도에 있다(Chen, 1992).


‘근처에서 말하기’를 실천할 때도, 나는 저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하는 일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체취가 달라 코가 찡그려질 수도 있고, 속도가 달라 답답하거나 조급해질 수도 있다. 연대의 감각이 익숙해지는가 하면 다시금 불편해질 것이다. 자주 기분 나쁠 것이고, 기분 나쁜 내가 부끄러울 것이다. 하지만 엉덩이는 익숙해질 것이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머리와 마음이 고민하는 사이, 이미 저만치 앞으로 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이 아닌 한, 연대의 감각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나는 앞으로도 어딘가에 가서 ‘그들만의’ 농담을 들으며, 내가 웃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몰라 초조해하며,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앉아 있다가 집에 가는 길에 “ㅇㅇ 뜻 어원” 같은 것을 네이버와 트위터(X)에 찾아보며 나의 자격과 지식(의 한계)을 확인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단어의 의미를 확인했나요? 체크.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나요? 체크. 역사와 맥락을 살펴보았나요? 체크. 경계 밖에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나를 ‘올바름’이라는 가상의 척도에 견주며 나의 자격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재확인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자위할 것이다.


나의 헤테로 친구가 나를 ‘부치’스럽다고 할 때 함께 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친구에게 직접 하기 부끄러운 이야기를 일기장에 적으며 나의 유난과 나의 편협함과 나의 아량과 나의 정당성의 크기를 서로 맞대어 볼 것이다. ‘경계 안’에 위치하는 일조차 나의 불안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럼 위치란 무엇이고 정체성은 또 무엇이며 나는 도대체 어떤 자격을 지닐 수 있는지 몰라 괴로워할 것이다. 이렇게 언제나 경계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자기 의심과 자기 위안의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며, 영영 연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과 어쩌다 한 번 연대를 느끼는 순간의 짜릿함을 비교하며 과연 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물을 것이다.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하며, 예상치 못한 때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나를 수치스럽게 하는 불쾌한 감정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 감정들이 혐오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 다독일 것이다. 그러니까 과연 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늘 예스일 것이다. 둘은 너무 많지만, 그 사실과는 아마 평생 싸우겠지만, 아무래도 하나는 너무 적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살기는 글렀으니


“뭐 하자, 피곤해. 그렇지 않아? 사는 동안은 이만저만, 이만이 저만하고 다 고만고만하고 이만저만고만고만하게. 이만이 이만 하였으므로 저만이 저만하였기에.”


웃기시네. 20분 채 안 되는 공연에 가발부터 재킷, 바지, 새빨간 장미가 그려진 빤스까지 벗어제낀 사람이 숨을 헉헉대며 나와서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당신은 ‘이만저만고만고만’과는 아마 정반대의, 척도화할 수 있다면 저 멀리 어딘가, ‘누구보다 절실하게’ 정도에 위치할 사람이란 말이다.


나는 방금 당신 때문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살짝 부서졌다.


나는 방금 당신 때문에 나를 의심하고 나를 확인하였으며, 위태로웠고 안전했으며, 혼란스러웠고 무지막지하게 기뻤다.


불편했고, 창피했고, 입으로는 환호를 지르며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를 적었고, 이 글을 썼다.


이제 나는 어쩌면 바로 당신이기에 그런 소리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어쩌면 수없이 당신과 불화하며 무언가 살짝 부서지는 경험을 했을지 모른다. 당신은 지금도 싸우고 있을지 모른다. 그 균열과 불화의 지점에서, 경계에서, 당신은 당신만의 “진짜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그런 당신의 삶더러 ‘이만저만고만고만’하다고 말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정말로, 빤쓰 벗는 것 따위는 이만저만고만고만한 일상인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그 둘은 같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당신이 아니기에,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영영 모를 것이다. 아는 듯 모르는 듯, 언제나 궁금해하며, 언제나 근처에서 살아갈 것이다.



[1]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2] 모어는 “발레리나, 뮤지컬 배우, 안무가, 작가, 누군가의 자식, 친구, 연인, 성소수자, 드랙퀸, 끼순이, 그리고 토슈즈 신는 미친X”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아티스트다. 영화 <모어>에 출연했다.

[3] 고려대학교 소수자인권위원회.

[4] 암기를 잘한 덕인지 아는 척 연기를 잘한 것인지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나중에는 무려 기후정의 관련 토론회에 ‘여성·소수자 활동가 대표’로 서게 되었다. 그때도 토론문을 쓰며, 그것을 외우고 읽으며, ‘제발 질문하지마 제발 질문하지마 제발 질문하지마…’ 염불처럼 외었다. (야속하게도 누군가는 내게 질문을 했고, 나는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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