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반은 상상 속 세계인 바비랜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성이 사회를 주도하고, 모든 여성들이 인종과 생김새에 상관없이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바비랜드와 바비들은 소녀들의 꿈으로 만들어진 이상적인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면에는 남성 캐릭터인 켄들은 집이 없고, 너무 과하게 특별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캐릭터들은 은연중에 무시당하는 모습 또한 유머스럽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모순된 유토피아에서 행복을 이어나가던 바비는 어느 순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고 이를 계기로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생겨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현실세계로 괴상한 여행을 가게 되는 게 영화의 기본 줄거리입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변화한 페미니즘의 모습
이제는 '걸즈 캔 두 애니씽'의 대표주자가 된 바비. 적어도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게 아니다.
영화 바비는 상상 속 세계인 바비 랜드와 현실 세계를 오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페미니즘 영화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여성인권향상 혹은 여성우월주의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변화한 페미니즘의 모습 또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바비가 처음 나올 시기에 바비는 모든 여아들에게 사랑받는 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현대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나, 나이, 영향력, 직업은 많이 달라졌고 이에 따라 바비는 시대착오적인 성상품화 제품이라는 혹평을 듣기도 합니다.
대통령, 대법관, 의사, 공사장 감독 등등 모두가 특별한 여자가 될 수 있다는 꿈과 순진한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는 전혀 변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비는 현실을 전혀 생각지 않고 모두에게 최상위급(리더급) 특별함을 강요한다는 현대 페미니즘의 비판 앞에서 아무런 반론을 꺼내지 못합니다.
분명 여성들의 우상이었던 바비는 왜 배척의 대상이 된 것일까요? 결국 바비는 남성위주의 사회가 만든 '전형적인' 여성상에불과했던 걸까요?
영화는 마텔사(바비를 만든 회사)를 남성 임원들로 가득한 모습으로 풍자해 관객들에게 구시대의 상징이 되어버린 바비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지금 몇 시인가요?
바비들을 위한 유토피아는 있어도 켄들을 위한 유토피아는 없다
작중에서 켄은 현실세계에서 지나가던 여자에게 시간을 묻는 질문을 받습니다. 시간은 시대를 의미하고 켄의 시점에서 현실 세계의 현시대는 남성들의 시대입니다.
현대 사회는 여자들도 고위직종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여전히 남성 권력자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긴 합니다. 이렇게 감독은 지나가듯이 하는 질문을 통해 현대사회가 어떤 형태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켄은 가부장제와 마초스러움이 강조되는 남성위주 사회의 모습에 푹 빠져서 바비랜드를 자기 입맛에 맞는 켄덤랜드로 세뇌해 나갑니다. 그리고 바비랜드로 돌아온 바비에게 자신의 시계들을 보여주며 이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이자 시대임을 상기시킵니다.
현실 세계가 여전히 남성 주도적이지만 여성의사와 같은 예외가 있었음에도 켄덤랜드에서는 여성은 무조건 남자의 하수인 내지 장식품이 되어있는데 이러한 켄의 시선과 행동은 자신의 자존감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극단적인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성별 반전 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극단적인 사상도 결국 바비들의 유토피아가 켄들의 유토피아가 된 것처럼 그저 피해자가 바뀌었을 뿐인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가?
꿈이 현실을 만나는 순간은 원래 힘든 것이다. 그래도 필요한 일이다.
영화 바비가 기본적으로 내세우는 메시지와 주제는 이렇습니다. 꿈과 현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시간이 지나면 변화한다. 성별에 상관없이 타인과 스스로를 믿고 존중하며 평범한 자신도 사랑하자.
앞서 말했듯 바비는 남성위주 사회가 만든 '전형적인' 여성상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결말부 한 여자의 입을 빌어 바비는 근본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듯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하는 꿈의 상징이었음을 드러냅니다.결국 현대 페미니즘이 배척하는 바비와 특별함의 강요는 꿈을 이룰 수 없는현세대의 좌절과 비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좌절할지언정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말합니다.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통해 바비와 켄은 단순한 남녀의 상이 아니라 자아정체성(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상)의 상징으로 격상합니다.
이후 여러 소동을 격은 켄과 바비는 각자가 선택한 특별함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바버라는 바비가 되고(현실은 꿈이 되고),
바비는 바버라가 되고(꿈은 현실이 되고),
켄은 켄이 됩니다(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좋았다기보다는 안타깝다
전달력이 흐려지게 만드는 가벼운 분위기가 장점이자, 단점
분명 메시지나 주제에는 이렇다 할 문제가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가벼운 분위기로 전개되는 내용상 빌드업이 너무 약하거나 없기 때문에 갈등이 붕 떠있다가 결국 해결된다는 인상이 옅어 이런 소재로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인 게 분명 재밌고 좋은 메시지임에도 소재를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고 너무 유머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애쓰고 있습니다. 산만한 전개에 이렇다 할 캐릭터들에게 감정 이입될 여지마저 없어 후반이 되면 루즈해지고 전하고자 하는 바를 느끼기 쉽지 않게 만듭니다.
이 와중에 작품이 추구하던 휴머니즘은 워낙 생뚱맞아서 다른 작품 결말을 바비에 끼워 맞춘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게 만듭니다.
그래도.. 재밌어요!
좀 이상해서 그렇지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하고 재밌는 영화는 맞다.
이렇게 영화적으로는 비판할 거리가 있는 작품이지만 여전히 바비는독특한 매력이 존재합니다.
핑크로 가득 찬 비주얼이야 일단 끝내줍니다. 실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듯한 초반 바비랜드의 모습은 정말 재밌었습니다. 중간중간 바비들이나 켄들의 모습들과 다양한 의상들도 매력적이었고요. 전달 방식이 이상하다고는 했지만 결론적인 주제 자체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들의 불편한 시선이 적지는 않지만 여전히 할리우드 영화 시장에서는 큰 영역을 차지하는 이야깃거리이고 바비는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이니 만큼 호불호가 강하게 작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대중의 마음도 생각하는 작품이며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에 대한 존중과 휴머니즘(혹은 인간찬가) 또한 지향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중들에게는 적잖은 불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도 영화의 완성도는 따질 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현대사회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의 여지를 보여주는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