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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몬 May 24. 2024

회색 도로를 지나 검은 숲으로

이번 몽골 출장을 앞두고 출장자들과 상의했다. 몽골에서 별을 보러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공식 일정이 끝나고 출발하면 아무리 빨라야 저녁 7시였는데, 호텔에 복귀하면 밤 1시쯤 되는 모양이었다. 다음날도 아침 9시부터 회의가 있으니 부담스러운 일정이었다. 하지만 몽골까지 와서 별도 보러 가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가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다섯 명의 투어 비용은 20만 원쯤 했다. 호텔로비에서 기다리면, 운전기사가 6인승 밴을 몰고 오기로 했다.


별 보러 가기로 한 당일, 한 사람이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다고 불참 의사를 밝혔다. 어차피 비용은 환불받을 수 없어 투어는 그대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오후 회의를 빨리 마쳐야 정시에 출발할 수 있는데, 마지막 종료 시간을 앞두고 이야기가 길어졌다. 휴. 마음이 급해졌다. 예정된 시간에는 끝내줘야 할 것 아닌가?


또 한 사람이 불참 의사를 밝혔다. 말을 타고 싶었던 그는, 일정이 늦어져 말타기가 불가능해질 것 같자 투어를 포기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셋. 우리는 별을 보러 갈 수 있을 것인가.


회의가 어찌어찌 끝나고, 호텔방에 부랴부랴 올라가 노트북과 자료들을 던져놓았다. 그리고 몽골의 초원은 춥다기에 준비해 온 얇은 패딩을 들고 호텔방을 나섰다. 그날 나의 별 동지 두 사람은 이미 로비였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도, 오기로 했던 운전기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행사에 연락을 해보았더니, 호텔 바로 건너편이지만, 차가 막혀 꼼짝을 못 하고 있다고 했다. 차를 세우고 우리를 태우러 오면 시간이 더 걸릴 테니, 우리에게 대로변에 나가서 타는 건 어떨지 물었다. 우리는 호텔 앞으로 나갔다.


나가서 보니 정말 차들이 꼼짝을 않고 있었다. 몽고에 입국했던 날,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때도 차가 엄청 막혀 고생을 했었는데, 그날은 정체가 더 심해 보였다. 거기다 우리를 태우러 오는 차는 유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는데, 바로 그 유턴 차선에서 사고가 난 듯 보였다. 경찰차와 렉카가 그 혼란한 차선에 들어가 있었고, 차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사방에선 빵빵하는 경적소리가 들려왔고, 검은색 연기를 뿌아아앙 뿜어내는 트럭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대로변에 서 있자니 매캐한 매연에 목이 따끔거렸고, 코앞이라는 데도 언제 올지 모르는 밴을 기다리자니 피로가 몰려왔다.


마침내 검은 밴이 나타났다. 이미 시간은 7시 40분이었다. 투어를 포기한 두 사람이 현명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두 사람이 투어를 포기한 덕분에 큰 차를 셋이 편하게 타고 갈 수 있었다. 물론 그 큰 차가 울란바토르를 빠져나갈 때까지 도로는 심한 정체상태였다. 창문을 열면 매연이 들어오고, 창문을 닫으면 더워 연신 손부채질을 하다 못 참겠으면 창문을 열었다를 반복했다. 우리가 에어컨을 켜달라고 얘기했고, 버튼을 눌러주긴 했지만, 어쩐지 시원한 바람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막히는 차 안에서 우리는 온갖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결국엔 다들 지쳐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게 되었다. 몽골은 해가 늦게 지는 나라였다. 시간은 9시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아직 밖이 환했다. 그러다 차가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도로에 조금씩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 드디어 정체를 벗어난 걸까, 안도감이 몰려왔다.


시내를 벗어나자, 도로 양쪽으로 초원이 펼쳐졌다. 말이 풀을 뜯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말을 탄 사람들도 간혹 보였다. 높은 건물도 높은 산도 없으니, 지평선까지 하늘이 이어졌다. 하늘이 참 넓기도 했다. 그 넓은 하늘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구름이 신비한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구름 뒤에서 빛나는 태양이 신비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투어를 포기한 두 사람이 옳았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던 우리는 "오길 잘한 것 같아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곧 해가졌고, 깜깜한 도로를 열심히도 달려 마침내 테를지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에 도착하자, 이제는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했는데, 구덩이와 벌어진 틈들이 많아 느린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살짝 솟사 있는 둔덕과 꽤 깊은 구덩이를 연달아 계속 넘어설 때, 한 번은 내려서 이 차를 밀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요령 좋은 운전기사님은 그 지형에 익숙한 듯, 요리조리 핸들을 돌리며 잘도 구덩이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마침내 게르들이 있는 캠프에 도착했다. 그 게르에서 자고 오는 투어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잠시 그 게르에서 숨을 골랐다. 이제 별을 보러 어디론가 가는 모양이었다. 그 운전기사는 우리에게 손전등을 하나씩 들려줬다. 게르가 있는 캠프 지역을 벗어나 쇠로 된 울타리 문의 잠금을 열고 비밀의 숲에 들어섰다. 해리포터에 나온 금지된 숲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몽골은 해발고도가 1,300에서 1500 정도 되는 고원지대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조금만 오르막을 걸어도 숨이 찼다.


그렇게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더니, 키가 큰 침엽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뾰족뾰족한 나무 너머로 달이 보였는데, 달이 정말 커서 내가 달에게 다가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늘을 아무리 쳐다보아도 별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천체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은 커다란 보름달만 주변을 압도하는 느낌으로 떠있었다. 그 침엽수를 해치고 나아가다 공터 같은 곳에 도착했다. 거기서 운전기사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하는 말, "the moonlight..." 달빛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 내가 여기서 원래는 별이 많이 보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별이 없어 아쉽기 보단, 신비로운 달빛으로 꽉 찬 숲이라니 늑대라도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함까지 있어 이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별 대신 달이었다. 다음번 별구경을 계획한다면, 보름은 피해야 한다는 걸 배우기도 했다. 다시 게르가 모여있는 캠프로 돌아오는 길, 한 밤중의 숲 속, 달빛, 이름 모를 벌레와 새소리로 꽉 찬 그곳을 떠나며 이 신비로운 곳을 떠난다니 아쉽기까지 했다.


낮에 회의를 하며 머리가 지끈거렸던 순간도, 일정이 늦어질까 조급했던 순간도, 차안에 갇혀 있어야 했던 그 정체 상황도 모두 별 것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마법의 달빛이었다. 끝까지 투어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그 밴에서 내려 호텔 로비에 들어서며, "다녀오길 잘한 것 같아요"라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평을 했다. 그리고 분명 그날은 아무리 낯 선 호텔이라도 금새 잠이 들 수 밖에 없을 터였다. 마법의 숲을 헤맨 뒤여서, 침대 속은 더할나위 없이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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