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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몬 Aug 07. 2024

약봉지의 복수

하루는 급하게 처리하고 갈 일이 있어 사무실에 남아 일을 해야 했다. 저녁 7시쯤이 되었을 무렵,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퇴근을 못하고 남아서 일을 하려니 기분이 나빠지는 건가? 싶었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진작에 일을 줄 것이지, 이렇게 다급하게 주는 거야, 그런 생각에 내 안에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왜냐면 내가 그 일을 받았던 오후 시간에는 그냥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용한 사무실에서 혼자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자판을 우다다다 두드리던 나는 어느 순간 모니터를 바라보는 게 힘들어졌다. 점점 글씨를 읽는 게 어려워졌고 집중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다 이마를 짚었는데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는 앞이 하얗게 되더니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그제야 나는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염좌로 받아온 정형외과 약을 저녁 먹기가 귀찮아 대충 쿠키 하나 먹고 삼킨 게 문제라는 걸 떠올렸다. 눈앞이 하얬고 식은땀이 났고 손이 떨렸다. 뭐라도 입에 넣어야 했다. 사무실 간식들을 겨우 집어왔다. 하나씩 까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힘듦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물론 내가 느끼기에는 1시간도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사무실 간식들 덕분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식은땀도 잦아들고 어지러움도 진정되었다. 눈이 다시 맑아지고 앞의 글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휴~ 고비는 넘겼다. 약봉지를 보니 식후에 복용하라는 박스에 체크가 되어 있다. 복용법을 무시한 탓에 나는 겪지 않아도 됐을 불쾌함과 아픔을 모두 느껴야 했다.


자잘한 원칙들은 지키지 않아도 한 두 번, 아니 어쩌면 그 보다 꽤 많이, 별 일 없이 지나가는 행운이 따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꼭 한 번은 탈이 나게 되어있다. 그때는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싶지도 않은 과자를 우걱우걱 씹어먹은 오늘의 나처럼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를 하게 된다. 나는 오늘 과자 몇 개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런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정말 깊은 후회가 뒤따르는 '큰 탈'이 날 수가 있다. 사소해 보이는 원칙이라도 잘 지켜야겠다는 걸 고생하며 배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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