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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29. 아스토르가 식당에서 당한 사기 (5월 3일 수)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산 마르틴 델 카미노 San Martin del Camino ~ 아스토르가 Astorga      

  새 건물이라 후기가 좋던 알베르게(La Huella Pilgrims)는 일찍 출발하는 순례자에게는 최악이었다. 좁은 복도 이외 어떤 여유 공간도 없어서, 순례자들은 좁은 복도에서 뒤엉켜 짐을 싸고, 쭈그리고 앉아 등산화를 신느라 북새통이었다. 

  야외에 의자가 있긴 했지만 춥고 전등도 없어 깜깜했다. 전자레인지도 없어, 데울 필요 없는 샌드위치를 아침에 먹으려고 어제 사놓았다. 그런데 샌드위치조차 먹을 공간이 없어 세탁실에서 선 채 먹고 출발했다. 알베르게를 벗어나 숨을 크게 쉬었다.     


  어둠 속에서 현란한 새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요함이 밀려왔다. 우리는 적막함을 즐기며 걸었다. 서서히 먼동이 터오며 하늘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현실이 아닌 듯 환상적이다. 길옆에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꽃들은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해가 떠오를 즈음 리 오르비고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길고 오래된 다리와 넓은 공터는 마상 경기장이라고 한다. 다리처럼 보인 곳은 관중들이 구경하는 관람대인 것 같다. 지금도 실제로 행사가 벌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서 본, 갑옷 입은 사람을 태운 말이 달리는 경기 장면이 눈에 그려졌다. 

  오늘 목적지 아스토르가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은 거리가 가깝지만 차도 옆을 걷고, 오른쪽은 조금 돌고 산을 넘는 길이다. 우리는 오른쪽 산을 넘는 길을 선택했다. 차도와 멀어지며 순례길 특유 고요함과 차분함이 느껴지는 들판이 나타났다. 어느새 밀이 많이 자라 밀밭은 흰빛을 띠는 녹색이 되었다. 산은 완만해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눈이 시렸다. 순례길 초기, 파란 하늘에 감동했던 기억이 났다. 사방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왜 그런지 가슴이 먹먹했다.

  걷고 또 걸었다. 해는 점점 높이 뜨며 뜨겁게 내리쬐었지만, 덥다고 느끼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언덕 위에는 기부제 카페가 있다. 원하는 음식을 먹고 자유롭게 기부하면 되는데 우리 배낭에는 간식과 물이 있어서 사진만 찍고 지나쳤다.     

과일, 물, 빵 등 간식을 먹고 자유롭게 기부하는 기부제 카페

  그동안 보면서도 보이지 않던 꽃들이 오늘따라 유달리 내 관심을 끌었다. 아카시아꽃도 한창이고 보라색 라벤더와 빨간 양귀비도 화려한 빛깔을 발했다. 이름을 모르는 꽃들도 자신을 하나하나 드러냈다.     


  아스토르가로 들어가려면 기찻길을 건너야 하는데 건널목 대신 자전거, 유모차, 휠체어를 위한 배려인지 커다란 육교가 있다. 그런데 육교를 건너려면 지그재그로 돌고 돌아 올라가서 길을 건너고 다시 지그재그로 돌아서 내려와야 한다. 기찻길 하나 건너기 위해 얼마나 많이 오르내리며 걸었는지 모른다. 동네 사람들은 기찻길 건너는 것만으로 운동이 충분할 것 같다.    

기찻길 건널목을 건너려면 엄청난 육교를 오르고 내려야 했다.

  아스토르가 예약한 사립 알베르게(MyWay Pilgrims Hostel) 주인은 친절했고, 침대도 깨끗하고, 배낭 택배도 바로 왔다. 모두 순조로웠다. 그런데 배낭을 정리하던 남편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제 묵었던 알베르게(La Huella Pilgrims)에 핸드폰 충전 케이블을 두고 왔단다. 오늘 새벽 출발 준비할 때 좁은 복도에서 순례자들이 뒤엉켜 북새통을 떠는 통에 모두 정신없었다. 남편은 내가 소음 내지 말라고 해서 제대로 못 챙겼다며 나를 원망했다. 그 말에 화가 났지만 아무 말 못 했다. 

  충전 케이블 무게가 얼마나 된다고, 나는 짐 무게를 줄이겠다며 충전 케이블을 아예 가져오지 않았다. 그동안은 남편 것을 빌려 썼는데 이제 핸드폰 충전을 어떻게 하나 싶어 머릿속에 하얘졌다. 

  우리는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정신을 얼른 차리고 알베르게 주인에게 충전 케이블 살 수 있는 가게를 물어보았다. 다행히 아스토르가가 조금 큰 도시라서 충전 케이블을 파는 슈퍼마켓이 있다. 어제 머물렀던 곳처럼 작은 마을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충전 케이블을 사고 가벼운 마음으로 밥을 먹으러 가까운 광장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구글 평점도 좋은 곳이지만, 우리가 주문한 ‘오늘의 메뉴’ 맛은 형편없었다. 우리는 음식을 남기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이번에는 도대체 다 먹을 수 없었다. 그동안 순례길에서 먹은 어떤 음식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포도주도 잔 바닥에 깔릴 정도로 양이 작았다. 

  식사 후 계산서를 보니 금액이 터무니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늘의 메뉴’를 먹으며 음료값을 따로 낸 적이 없는데 음료값이 따로 계산되어 있다. 자기네는 ‘오늘의 메뉴’에 음료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포도주 한 잔 값이 너무 비싸다고 하니, 그건 실수라며 수정된 계산서를 가져왔다. 그것 역시 비쌌지만, 그냥 계산하고 나왔다. 그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액수는 크지 않지만, 기분 나쁘고 힘도 빠졌다.     

  거리를 걸으며 독수리를 누르는 사자상도 보고, 성당도 보고, 여러 조형물도 보았지만, 흥이 나지 않았다. 옛날에 만든 성벽 일부가 남아있는 곳에 조성된 공원만 대충 돌아보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새로 산 충전 케이블은 정품이 아니라 핸드폰 충전 속도가 너무 느려 속이 터졌다. 순례길 하루하루, 이야깃거리가 매일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순례길도 사람 사는 하루하루와 다를 바 없다.      

알베르게 근처 성당 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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